
파독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세월만 흐르는 것 같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국민들의 아픔을 그들만은 알고 있다.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이야기를 결코 해야만 하는지? 파독 간호사들은 조심스럽게 이야기 한다. 아마도 그것은 조국건설의 초석이 되었기에 그날의 아픔을 토로하지 않을까 싶다.
올해가 한국간호사들이 독일에 파견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파독 간호사 현자뮐러의 삶이 소개되면서 그들의 아픈 이야기가 연극무대에 올려졌다. 그들의 모국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제목은 “베를린에서 온 편지”이다.
돌이켜 보자.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만여 명의 간호사들이 가난을 피해 또 가족과 국가를 위해 독일로 건너갔다. 그중에서도 현재까지 독일에 살고 있는 간호사들은 모국을 그리워하면서 외로움과 쓸쓸함으로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 연유에서일까? 현자뮐러의 삶과 파독간호사들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담은 연극이 우리들의 가슴을 후비는지 모르겠다.
참! 가슴이 아리고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편지를 보게 되믄 서독이 겄지. 항상 고맙고 든든한 우리 큰 딸, 너무 힘드면 돌아와라. 너무 멀리 보내서 어미 가심이 찌져진다. 오메 이년아 돈 벌라고 밥은 절대 굼지 말거라. 어미 옆에서 가치 살자. 1966년 12월 동짓날 즈음에 어미가.”라는 편지 내용은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배고픈 시절, 배가 고파서 밥만 먹여 준다면 일당도 없이 하루 종일 일만하던 시절, 최저임금도, 아르바이트도 없었고 시급이라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점심을 굶는 것은 매사였고 허기진 배를 수도 물로 채우며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연극내용은 어느 날, 그녀는 오래 전 잃어버렸던 가방을 되찾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 가방 안에는 먼 타국으로 가는 딸에게 쓴 어머니의 편지가 들어 있고, 이야기는 현자가 독일에 도착하던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간호사 일을 하면서도 청소부터 잡일까지를 도맡아 해야 했던 파독생활을 절절하게 표출한다. 특히 자신에게 주어진 그 시간들을 웃는 얼굴로 성실하게 이겨낸 그들에게 독일사회는‘한국의 천사들’이란 이름을 붙였다. 무엇보다도 연극 '베를린에서 온 편지'는 60~70년대 먼 이국땅에서 꿋꿋하게 살아왔던 파독간호사들의 삶과 애환을 진솔하게 담아내 감동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아프리카 최빈국 같은 나라였다. 1961년 12월 12일 한국사절단은 1억5000만 마르크(당시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얻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은행의 지급보증이 있어야 했다. 한국의 재무부를 중심으로 해외은행들을 수소문했지만 국가신인도가 없었던 한국에 지급보증을 해 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협상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 상황에 이르렀다. 이 때, 지급보증을 대신할 수 있는 수단은 파독광부와 간호사였다.
잠시, 그 예를 들어 볼까 한다. 서독 측에서는 “지금 서독은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웬만한 데는 다 파내 지하 1000m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 뜨거워 다들 나자빠져 있다. 파키스탄, 터키 노동자들도 다 도망갔다. 혹시 한국에서 한 5000명 정도를 보내줄 수 있겠느냐? 간호조무사도 2000 여명 필요하다. 시체 닦는 험한 일도 해야 하는데, 독일인은 서로 안 하려고 한다. 만약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줄 수만 있다면, 이 사람들의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려 줄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한국사절단은 곧 바로 파독광부와 간호사를 모집, 파독했고 마침내 상업차관을 빌리게 됐었다.
아무튼 파독간호사와 광부들의 삶 속에는 우리들의 가난의 역사가 묻어있다. 그 역사를 바탕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성장했다. 그들의 삶이 연극무대로 올려지고, 그들의 이야기가 대학가에 회자되고 있다. 파독간호사, 광부들의 삶과 얼이 흐려지지 않도록 가꾸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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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7 09:5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