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수 시인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 강소천의 동시인 ‘보슬비의 속삭임’이 생각난다. 이 동시처럼 모나지 않고 언제나 둥글게, 둥그렇게 퍼져나가는 삶, 그 삶을 살아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염없이 비가 내린다. 빗발 따라 나선 사색 길은 깊어만 간다.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삶을 영위 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정치인으로, 어떤 사람은 경제인으로, 어떤 사람은 문화예술인으로, 어떤 사란은 체육인 등으로 자신의 인생목적을 위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 삶을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생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함께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복잡 다양한 사회라는 구조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길을 간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험난한 길이 아닐 수 없다. 어느 길이든 고난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 과정 속에는 수많은 피와 땀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기정사실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 피와 땀을 흘리지 않고서도 고난을 극복하려는 모가 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특히 위정자들을 비롯해 법조계, 경제계, 종교계, 언론계, 교육계의 모가 난 삶은 심각할 뿐 아니라 사회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먼저 우리의 현실정치를 살펴보자. 국가와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당리당략만을 일삼고 있는 실정이다. 거슬러보면 당파싸움으로 나라를 망하게 했던 조선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다.
두 번째는 법조계와 언론계들의 들어나지 않는 모난 삶이다. 즉, 권력위의 권력남용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바탕으로 정계로 입문하는 등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다.
세 번째는 종교계다. 선을 추구한다는 목적 하에 상술이 가미된 채로 각종 선금 등이 난립하는데다 교세가 크고 작음에 따른 숫자놀음식의 기업화가 되고 있다.
네 번째는 경제계다. 문어발식의 사업구상으로 골목상권까지도 송두리째 앗아가서 부를 축적하는가 하면 정경유착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다섯 번째는 교육계다. 인성과 학문의 가르침은 뒷전이고 오로지 자신의 영달만을 꾀하려 할뿐 상아탑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다.
어쩌면 산업사회의 흐름에 발맞추고 있는 사회변화일지도 모른다. 특히 핵가족제도의 당연성에 따라 모든 사회풍토가가 변화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기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예부터 선인들은 각지고 모가 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삶은 곡선이 아닌 직선의 삶으로 生의 선이 아니라 死의 선이다고 했다. 특히 선인들은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각을 세우지 말라고 했다.
오늘따라 동그라미 삶이 그리워진다. 유년시절에 필자가 그렸었던 동그라미에는 별의 별 동그라미가 많았던 것 같다. 아름다운 소녀의 동그란 얼굴에서부터 동그란 눈, 그리고 시험지 정답에 그려진 동그라미, 동그란 꽃송이 등 온갖 동그라미가 연못 위에 그려지고 있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비껴간 인연을 잇고 잇는 동그라미다
빗물처럼 흘러갔던 시간들
빗발사이사이를 끼어 다니고
잃어버린 정
잊었던 사람
비에 젖은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다
빗줄기 따라가고
빗줄기 따라왔던
동그라미는
천사의 눈물도
하늘의 슬픔도
아니다
어린 날 보았던 까만 눈동자다
촉촉하게 젖은 까만 눈망울에서
살며시 떨구는 눈물의 알갱이다
야윈 삶이
토막토막 이어지는 장터에서
가을비에 젖고 젖은 사람들이
빗방울처럼 동그란 동그라미 그리며
동전을 주고받다가 돈을 세고 있다
가끔씩
번개 불로 지져대고
천둥그물 둘러치며
수많은 동그라미 그리게 하는
부처도 예수도 하늘도 미쁘다 (필자의 동그라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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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7 10:44 송고
2016-07-07 10:48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