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되고 햇빛에 바래어 지면 역사가 된다고 한다. 한반도의 남국에서 유일하게 창조된 한라 여신들이 빚어낸 신화의 땅에서 벌어진 4·3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제주에 와서 신화와 역사가 혼돈되어 현실의 캄캄한 동굴 속에서 분리되고 깨어나는 것을 보면 나는 두려워진다.”
위 글은 송수권 시인이 “흑룡만리”를 애지에 연재하면서 민족의 답답한 심정과 자신의 생각을 간략하게 표출했던 것으로 본다.
송수권 시인은 아직도 분단의 아픔과 그 상처의 흔적을 좇아 대서사시를 쓰고 있다. 달궁아리랑과 빨치산에 이어 세 번째로 쓰고 있는 대서사시 ‘흑룡만리’는 다름 아닌 제주 4.3사건이다.
제주 4·3 사건이란 무엇인가? 제주 4·3 사건이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사건을 말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을 하고 미군정 시대에 재등장한 친일세력들이 그들만의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고자 했을 때, 남조선노동당은 그것을 격렬하게 반대를 했던 것이다. 친미, 또는 친일 잔존세력들과 공산주의자들의 그 격렬했던 사상과 이념 투쟁 사이에서, 그 어느 노선도 아니며, 아무것도 모르는 제주도민 3만여 명이 무자비하게 대량 학살되었던 사건이다.
참으로 대단한 시인이 아닐 수 없다. 뒤 늦게라도 우리가 풀지 못한 이념을 대서사시로 기록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필을 놓지 않고 민족의 아픔과 서민들의 애환을 대서사시로 엮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특히 힘없는 자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그의 철학과 역사의식은 남다르다.
다시 말해 힘 있는 자의 기록이 정사라고 한다면 힘없는 자의 기록은 야사로써 주로 구전으로 전해지므로 발굴하기가 매우 힘들고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시인은 자신이 죽기 전에 묻히고 사라져버린 힘없는 자의 기록을 파헤쳐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이번에 발표할『흑룡만리黑龍萬里』는 장편 대서사시집이며, 일제식민시대를 거쳐서, 남북분단과 좌우 이념투쟁에 희생된 제주도민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가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 한국인들의 역사적 상처와 그 아픔을 치유하고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老시인의 정신이 흠뻑 젖어 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 이탈리아의 단테가 있듯이, 우리 한국문학사도 이제는 송수권 시인이라는 대서사시인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형권 충남대학 교수는 말한다. 송수권 시인은 그동안 서정성과 현실성을 고루 갖춘 작품을 창작해온 남도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서정성에 치우치는 시는 대책 없는 순정이 되기 쉽고, 현실성에 치우친 시는 메마른 이념에 불과할 터, 송수권 시인은 둘 사이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서정적 현실, 혹은 현실적 서정의 시학을 구축해왔다. 달궁 아리랑도 그러한 조화의 시학이 도달한 큰 봉우리이다. 이 대작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송수권 시인이 사석에서 했던 말씀이 떠오른다.
“깜냥엔 한국문학 통일시대를 내다보면서 지리산 서사를 써 보았다네. 태백산맥도 비껴간 지리산을 정면으로 도전해 본 것이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 작품과 관련된 대가급 시인의 건강한 문학관과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하여 달궁 아리랑은 한국시가 잃어버렸던 가열찬 역사성, 혹은 오롯한 문학성의 귀환을 의미한다고 말이다
이처럼 송수권 시인은 평생을 서정시 밭에서 뒹굴며 살아오면서도 역사성과 철학을 잃지 않았다. 그가 발표한 시집에는 언제나 전라도의 한이 서려있는 사투리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판소리가락이 춤을 춘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승화시키는 대서사시집 3권을 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흑룡만리”에 게재돼 있는 “수눌음”이라는 시를 읊조려 본다.
잠녀들이 바닷속으로 들어간 까닭은
설문대가 바닷속에서 솟았듯이
수직의 깊이로만 그들은 바닥을 긁는다
한라산이 그녀의 치마 속에서 솟았고
4백여 오름오름이 그 헤진 치마폭 구멍 속에서
쏟아져 쌓인 흙이었듯이
수직으로만 오름을 오르고
수직으로만 한라산을 오른다
용천수가 땅 속에서 솟아나듯이
제주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모두 삶의 길이
그 바닥을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것이다
걸대를 정낭에 걸어 안을 비워 놓고
애기 구덕 하나는 밭가에 부려 놓고
허리에 멱서리를 차고서
바닥을 긁어 씨감자를 묻듯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섬을
바다가 늘 수평선으로 빨랫줄을 치듯이
안보다는 밖을 더 튼튼히 얽어
올레길을 만들고 돌담을 쌓는다
유채꽃이 아름다운 빌레밭
오늘은 저녁 노을의 양파밭을 깔고 앉은
그 밭담 안의 수놀음 풍경이 물까마귀들 같이 정겹다
* 수눌음 : 품앗이(두레, 수놀음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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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0 10:15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