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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곳과 멀지않은 곳에 이름난 5일장이 있어 나는 자주 장 구경을 가곤 한다. 1. 6일에 열리는 양곡장, 3. 8일에 열리는 통진장, 4. 9일에 열리는 마곡장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멀리로는 양평의 지평장과, 강화의 풍물시장 등이 그것이다.
우선 장 구경을 가면 초등학교시절 소풍을 갈 때처럼 기뻐진다. 늙어지면 식성이 변하듯이 취미도 달라지는 법인데 장 구경만은 그렇지 않다. 무엇인가 나를 즐겁게 해 줄 것 같고 낯선 사람들과의 이색적인 만남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대체로 이러한 감정과 기대감은 거기 모이는 사람들의 수더분한 인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어디를 가나 장마당의 분위기는 시끌벅적하다. 채소가계는 채소가계대로 곡물가계는 곡물가계대로 어물전은 어물전대로 각기 다른 음색의 구호를 내지르며 손님들을 부르기 일쑤다. 거기다가 뻥튀기며, 엿장수의 가위소리까지 합치면 이건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건을 흥정하는 소리는 또 얼마나 드세던가. 토착어에 지방색이 있는 대로 드러난다.
누가 말했던가. 시장바닥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그 말처럼 없는 것이 없다. 농부의 손끝에서 정성껏 길러진 상추, 무, 아욱, 양파, 오이. 그리고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왕새우, 꽃게, 병어, 돔, 비린내 나는 갈치에 이르기까지. 공산품도 없는 것이 없어 낫, 삽, 호미, 괭이, 쇠스랑 등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다. 드물게는 화덕에 불을 일궈놓고 농기구를 벼리느라 메질을 하고 있는 대장간의 풍경도 목격할 수가 있다. 잘 달구어진 쇠붙이에 메질을 하는 것을 보면 원시적인 힘이 느껴진다.
그 기분을 이끌고 나는 약장사들의 공연장으로 가거나 각설이패들의 난장판으로 가기도 한다. 나는 으레 약장사들보다는 각설이패 쪽으로 기울기 일쑤다. 구성진 노래 가락이며 숯검정 칠한 얼굴이며 찢어진 핫바지의 율동이 볼 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구경의 백미는 소시장이 아닐까. 소시장에 가면 여느 곳과는 달리 삶의 활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원근 각처에서 몰려든 소들이 말뚝에 매어져 구매자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소의 외모만 보아도 그 소가 살아온 과거를 짐작할 수가 있다. 사육장에서 길러진 소들은 외부의 반응에 무딘 편이지만 주인과 함께 살아온 소들은 대체로 민감한 편이다. 코뚜레도 플라스틱이 아닌 물푸레나무를 매고 있다. 더구나 뒷다리와 엉덩이에 말라붙은 쇠똥을 보면 살아온 마구간의 환경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짐승들 중에서 소처럼 희생과 무저항의 상징으로 태어난 동물이 또 있을까? 모르긴 해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순종, 또 순종이 있을 뿐인 소. 평생을 일만하다가 그 뼈와 살과 가죽까지를 보시해 버리고 떠나는 소의 일생… 그래서 그런지 소의 큰 눈에는 항시 눈물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시장에서는 사람과 사람과의 이별에 못지않은 장면을 목격할 수가 있다. 팔려가는 소와 주인과의 이별이 그것이다. 소는 무게를 달아 가격이 매겨지면 곧 바로 트럭에 실려 떠나게 되는데 이때 소들은 울면서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주인의 마음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에 진배없이 아프게 느끼는 주인의 마음… 그때는 어김없이 그를 길러온 투박한 손이 눈물을 훔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나는 소를 실은 트럭이 출발하기 전에 그 자리를 피해버리고 만다. 거기 서 있다가는 그 페이소스에 휩쓸려 나도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시장을 빠져나와 발을 옮기면 어둠은 내리지 않았지만 파장에 접어든 것을 알 수가 있다. 아직 팔리지 않은 어물가계의 생선들과 야채가계의 푸성귀들이 생기를 잃고 있다. 상인들은 그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본전도 안 되는 값으로 넘긴다고 야단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그들의 술책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 때쯤이면 장터의 가계들은 손님들로 넘쳐나는데 나도 얼마쯤 시진한 객수에 젖은 채 술청으로 끼어든다. 술청에 끼어든 사람들은 거지반 중늙은이 일색이다. 기계로 말하자면 부품들이 닳아서 교체가 필요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쏟아낸 화제가 어찌 첨단을 가겠는가. 그렇고 그런 일상적인 대화가 고작인 것이다.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자서 국밥물을 마시고
빠알간 불사르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결국은 조금씩 취해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들
나는 문득 미당(未堂)의 시 한 편을 떠올렸다. 더도 덜도 말고 꼭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시. 나는 그러한 분위기의 사람들이 좋다. 너무나 잘난 사람들은 싫다. 가까이 하고 싶지도 않다. 온도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정형화 규격화 기계화 되어가고 있는 차제에 장터와 같은 생활공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나는 지금도 장날과 거기 모이는 수더분한 인정들의 매력에 빠져 있다. 인근 지역의 장날이 은근히 기다려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전생에 장돌뱅이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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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7 21:5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