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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들면 하늘이 보인다. 구름이 무리지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모니터를 쳐다보다 다시 하늘을 보니 좀 전에 구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푸른 호수만이 고요하다. 건물과 건물 사이 틈이 있고 그 틈새에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연못이 있다. 연못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그 옆에 연꽃이 피어있다. 사무실 안에서도 길게 자란 풀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모습과 물결의 흐름을 보면 창문 밖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가끔은 새들이 날아와 연못 속에 물고기를 사냥하는 경우도 가끔 볼 수 있다. 저 작은 연못의 세상에서도 치열한 생존법칙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인사이동으로 인해 새롭게 감상할 수 있는 풍경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1층이지만 전에 내가 있던 곳은 4층이었다. 그곳에선 남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한라산을 수시로 볼 수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한라산의 풍경과 그 주변에 오름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인사이동 후에는 1층이고 창문도 북쪽으로 나 있어 수시로 한라산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햇볕이 잘 들지 않아 4월까지도 손이 시릴 정도로 춥다. 반대로 4층은 햇볕에 의한 복사열로 몹시 실내 온도가 높아지고 바람 또한 통하지 않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게다가 한 여름엔 에너지 절약이란 국가시책에 의해 에어콘도 제대로 틀어주지 않아 청사를 방문한 민원인이 짜증을 낼 정도로 후텁지근한 날씨와 싸워야 할 판이었다. 그런 몹쓸 무더위에 비하면 여기는 훨씬 시원한 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초여름까지는 너무 춥다는 단점도 있지만 땀이 많고 더위를 타는 나로서는 덜 덥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된다. 인사이동으로 인해 내게 주어진 특혜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씨줄날줄로 촘촘히 엮어진 거대한 공동운명체다. 살아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관계를 끊임없이 만들어 나간다. 만남과 헤어짐도 반복된다. 그 속에서 관계라는 것이 형성된다. 좋은 관계일수도 있고 나쁜 관계일수도 있겠지만 이왕이면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소망일 것이다. 살다보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동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나도 일순위로 지망한 곳을 배정받지 못했다. 일순위로 지망했던 납세자보호실이 다른 곳에 비해 일이 편할 것이라는 기대로 신청했던 것은 아니다. 민원인이 자주 상담을 요청하는 분야에서 장기 근무를 했었기 때문에 그 곳이 잘 어울린다는 주위에 추천과 한 번도 근무해보지 않아서 경험해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나 보다 더 유능한 친구에게 보기 좋게 밀렸다. 아쉽기는 하지만 서운하거나 속상하지는 않다. 오히려 직원이 많은 여기로 발령을 받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고즈넉하게 돌아가는 물레방아와 물위를 유영하는 제비의 날랜 몸짓과 잔디 속에서 놀고 있는 참새의 평화로운 오후를 볼 수 있어서 좋다.

어린왕자에서 여우의 조언대로 길들이거나 길들여져야 한다. 하지만 길들이거나 길들여지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제각기 자신의 원하는 방향대로 관계를 설정하려고 하니 갈등이 생기고 충돌이 일어난다. 사랑으로 보듬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얻으려는 관계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성스런 손길로 가꾼 한 송이 꽃보다 눈에 확 띄는 들판에 화려한 꽃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안의 소중한 소리가 외부의 강력하고 달콤한 소리에 묻혀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영혼 없이 살아가는 가엾은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우정이 싹트고 사랑이 싹트고 살아가는 의미를 체득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항상 유쾌하고 바르게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때로는 상식에 벗어난 요구로 당황스러울 때도 있을 것이다. 본연의 업무보다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직원들을 힘들게 하는 상사를 만난 적도 있다. ‘치사하게 시리!’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지만 나약한 나를 발견하곤 고개 숙이고 만다. 도리가 아니라고 여기고 대들어 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불이익뿐이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직장 상사나 동료와의 일로 괴로워하는 후배들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위로해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회생활이니 참고 견디라. 그러면 분명 좋은 날이 올 거야” 말하고도 오래된 골동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인사이동이 있으니 업무환경과 상황의 변화는 온다. 비록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변화가 있다는 것은 괜찮다고 본다. 인사철이 되면 눈치작전이 치열해지는 순간을 맛보기도 할 것이다.

선호부서와 비선호부서의 문제도 있지만 함께 근무하고 싶은 사람과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이 사람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새로 만난 사람은 더 지독하여 ‘구관이 명관’이라는 푸념을 듣기도 한다. 대부분 웃어넘기고 마는데 당사자는 휴직을 내고 싶을 만큼 괴롭다는 심사를 내비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동 없이 한 곳에만 머물러 있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루할까. 괴롭고 지루한 상황이 떠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뇌리에 남아있다면 아마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나쁜 기억은 떠나보내고 새로운 기억을 맞이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는가.

인사이동으로 정이 든 사람과 헤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헤어지면 아쉽다고, 새로 만나면 반갑다고 술 한 잔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술 한 잔이 문제가 될 때도 있다. 분명 어제 저녁 택시를 타고 집 앞에서 내려줬는데 아침에 출근하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니지만 이마가 깨져서 몇 방울 꿰맸다는 것이다. 집 위치를 물어도 대답을 주지 않아 할 수없이 그 친구의 핸드폰 통화내역에서 ‘사랑하는 누리’라는 이름을 찾았다. 예상대로 그의 아내였고 집 위치를 들을 수 있었다. 간난 아기가 있어서 마중을 나올 수 없다는 대답도 함께였다. 그녀가 알려준 정보에 따라 그의 집 근처에 내려주었고 내리자마자 씩씩하게 걸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저 사단이 나고 말았으니 속상한 일이다. 같이 내려서 마나님 에게 인수인계를 확실히 하고 왔어야 했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다리 힘이 없는 내가 그를 부축하고 가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일전에 아내에게 호되게 질책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그 놈의 술이 문제다.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동료들을 만나고 즐겁게 어울리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게다가 2차로 홍어에 막걸리를 마셨다. 대문 앞까지 온 것은 기억이 나는데 집안에서의 기억은 없다. 술이 취해서 잠이 들었다는 추측 밖에는. 하지만 홍어 냄새가 진동하고 정신 못 차리는 나를 목욕탕으로 보냈지만 거기서 실신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그날 아침은 아내의 눈에서 발산되는 매서운 레이저광선을 맞아야 했고 나 때문에 죄 없는 술 공장만 심한 욕을 먹는 곤욕을 치렀다. 술이 사회생활에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순기능과 술 마실 수밖에 없는 입장을 너그럽게 이해를 못해준다고 변명을 해보지만 아내의 입장에서 나는 철딱서니 없는 인간이다. 집에서 걱정하는 아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진정으로 반성을 해야겠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혹은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남의 기준에 맞추어 살다보니 진정한 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진정한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을 쫓다보니 이리저리 헤매고 눈치보고 옹졸한 짓도 서슴지 않는 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내 탓이 아니고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면 그런 세상을 만들어버린 남 탓만 하며 비겁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 정신 좀 차려야겠다. 술에 지배되지 말고 술을 지배하는 그래서 남의 정신이 아닌 내 정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야지...

인사이동을 하면서 느낀 바가 있다. 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쉽고 남의 눈에 폼 난다고 생각하는 곳을 기웃거린다는 것이다.

일은 쉬우면서 승진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하다고 소문난 곳으로만 몰린다는 것이다. 조직이나 사회를 위하여 밥값을 해야겠다는 마음은 뒷전이다. 그리고 원하는 곳으로 선택을 받지 못하면 내 탓보다 남 탓으로 책임을 전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세상이 무한 경쟁 시대로 내몰려 있기 때문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욕망을 쫓아 뒤돌아 볼 여유조차 없이 앞으로만 달려야 하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숨이 막히는 일인가. 조금 뒤처지면 어떤가. 주어진 일 만큼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사는 것이 더 현명한 삶 일수도 있지 않을까. 왜 남의 시선으로 나의 삶을 재단하려 하고 있는 것인지 안타깝다. 나의 눈으로 보고 나의 걸음으로 걸어가면 족하지 않겠는가.

남의 욕망에 나를 밀어 넣고 살아간다는 것은 멈추지 않는 기관차에 몸을 싣고 그냥 떠밀려 가는 것이다. 인사이동을 맞아 마음도 이동을 해야겠다. 남의 욕망으로 살 것이 아니라 내 욕망으로 이동을 하자. 그리고 욕망이 버겁다고 느껴지면 조금씩 내려놓으면서 살자. 조금 늦으면 어떠리. 마지막 종착역은 어차피 똑 같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