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수케
갈색 짙은 갈밭 길에
늦가을 비가 내린다
철새 떼 날아들고
으악 새소리 들리는 갈밭 길을
표정 없이 걷는 사람
가을을 타는 걸까
갈밭에 빠진 걸까
아니 아니다
더러는 연두 잎에 내리는 봄비소리를 그리워하고
더러는 진녹 잎에 부딪는 여름비소리 아쉬워하고
더러는 산천 뒤덮는 새하얀 함박눈소리에 잠들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더미가
꾸러미로 꿰어지며
머리통을 쥐어짠다
잊혀지지도 않고
지워지지도 않는
추억갈피로 끼워진 이야기
두루뭉수리 버무려 진채
어디가 끝인지
어디가 시작인지
가르마 탈 수 없는 갈밭 길을
사그락 사르락 으악 새소리를
늦가을 찬비는 적시고 있다
메아리로 울려왔던 큰소리 기어들게 하고
가만가만 다가오던 작은소리 들리게 하는
갈밭에 비는 내리고
(2013년 11월 9일 순천만 갈밭 길에서)
늦가을 찬비가 내리고 있다. 초겨울 문턱을 밟은 계절이 가을을 붙잡지 못한 서러움에 눈물 같은 찬비를 흘리는가 싶다.
이런 날, 안 쓰고는 못 베길 글쟁이의 나들이는 더욱 더 간절하다. 한 줄의 낙서라도 하고픈 심정에서 이리저리 쏘다니다가 순천만을 찾는다.
그곳에는 우산을 쓰고 거니는 사람과 비옷을 입고 걷는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갈색 짙은 갈밭 길을 우산도 비옷도 없이 홀로 거니는 사람이 있다. 매우 쓸쓸하게 보였다. 아니 뭔가의 아픈 사연을 달래기 위한 사람 같았다.
그의 정체를 알고 싶어 그가 걷고 있는 길목을 지키며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회색바바리를 걸치고 빵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다. 네모진 얼굴, 오뚝한 코, 커다란 귀, 두툼한 입술 그리고 서글서글한 눈매 등 이목구비가 뚜렸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는 듯 자꾸만 묻는 말을 회피하면서 혼자 있기를 원했다. 그렇다. 이 늦가을에 자신만이 갖고 싶어 하는 시간,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뺏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 사람의 정체를 알고 싶은 까닭은 무슨 심산에서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정자였다. 아니 가을을 타는 남자였다. 칠순이 넘는 나이까지 정치무대에서 활동하고 또 다른 자신의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 깊은 사색을 하면서 걷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순천만 갈밭 길 사색담은 의외였다. 한시도 정치무대를 떠나서는 안 될 그에게 있어 또 다른 길은 뜻밖이었다. “귀농 길”이었다.
그는 자신이 정치무대에서 겪었던 추억담을 토막극처럼 꺼내면서 지난날의 자신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모두가 추억일 뿐 다 부질없다는 것을 이제야 느꼈다고 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는 권모술수가 능란해야하고 고도의 거짓말을 순간순간 서슴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 정치판에서는 줄서기는 물론이고 자신의 상대를 죽여야 하는 것이 통례로 폄훼와 비방은 당연지사라고 했다. 다시 말해 상대가 누가 됐든지 간에 그 상대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자신이 무너진다는 정치철학이 없는 한 정치판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 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발걸음은 몹시 가벼우면서도 왠지 착잡하게 보였다. 화려했다면 화려했고 진저리난다면 소름이 날 정도로 소름끼치는 정치판의 일상들이 못내 아쉬운 듯 그는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휘젓는다.
그는 말한다. 지금 걷는 순천만 갈밭 길은 지난날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으로 내일의 촌부를 잉태하고 있다고 말이다. 지난날 큰 울림으로 쩌렁쩌렁했던 큰소리가 이제는 가만가만 다가오는 늦가을 작은 소리로 들리며 으악새 노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어쨌든 내년에 치러질 지방선거에 뜻을 둔 위정자라면 한 번쯤 순천만 갈밭 길을 거니면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순천만 갈밭 길은 하늘의 순리를 그대로 일러주기에 깨달음이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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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0 21:12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