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 기사제보 | 즐겨찾기 추가
새 배너 / 순천시의회 새 배너
전체기사 포토영상 오피니언 들길산책 인물동정 지역광장
최종편집시각 : 2025.03.24 (월요일) 08:20
전체기사
ㆍ전체기사
기사제보
광고문의

가장많이 본 기사
이메일 프린트 퍼가기 글자크기 원래대로 글자크기 크게 글자크기 작게
다리에 관한 추억 / 시인 송 준 용
2013-04-24 오전 7:54:32 참살이 mail yongsu530@hanmail.net

    시%20도조예전%20및두례%20014

     

    앞에는 들판이 있고 들판을 지나면 개울이 있어 그 개울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놓여있는 것이 시골마을의 풍경이다. 그 다리는 보통 징검다리가 많고 드물게는 돌다리, 나무다리, 섶다리인 경우도 있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마을에 놓인 다리는 징검다리였다. 같은 크기의 돌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있어 건너기에 용이한 다리였지만 불편할 때도 많았다. 여름 장마철이면 물속으로 잠기는 바람에 바지를 벗거나 적시면서 건너야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것으로 여기면서 살았다. 그렇게 살아왔으니 어찌 기억에 남을 만한 추억인들 없겠는가.

    모두가 초등학교 시절 일어난 일이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다 고무신을 잃거나 미끄러져 다치는 사고는 허다하게 일어났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머니는 나에게 꼭 이르는 말이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지 말고 산 밑으로 난 우회로로 돌아서 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의 당부를 듣지 않고 건너다가 변을 당했다. 유속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는 바람에 대책없이 떠내려가다가 나뭇가지를 붙잡고 간신히 살아난 것이다. 그러했으니 몸인들 어찌 성했겠는가. 팔꿈치, 무릎 등은 상처로 얼룩졌고 책가방의 책들은 물을 먹은 채 한 짐이나 되었다. 그리고 두 발에 끼어있던 고무신은 언제 벗겨졌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날 어머니는 부엌에 불을 지핀 후 책들을 말려 주시면서도 “그러기에 내가 뭐라구 했어? 산 밑으로 돌아오라고 했지!” 이렇게 발끈했지만 때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번은 이웃집 아저씨가 논을 갈고 돌아오다가 갑자기 불어난 물에 소와 함께 빠져 허우적거리는 소동을 피운 적이 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기에 망정이지 큰 일이 날 뻔한 사고였다.

    지금은 그러한 다리가 없어지고 새로운 공법에 의한 콘크리트 다리로 변모되었지만 그러한 불편함을 무릅쓰고 건넜던 것은 화합과 소통으로 가는 이동의 통로였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 다리를 건넘으로써 새로운 세계와 접할 수 있었다. 면소재지가 있는 곳도, 군소재지가 있는 곳, 도청이 있는 곳도 갈 수 있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가 있는 곳도 갈 수가 있었다.

    그러한 편리함 때문에 지금은 육지와 도서지방을 연결하는 연륙교가 많이 생겨났다. 가거대교, 남해대교, 거금대교, 인천대교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외국에서 들어온 최첨단 공법으로 시공된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인천대교는 세계에서도 뒤지지 않을 만큼 최장거리를 자랑한다.

    교량공사는 단 시일 내에 끝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공사의 어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진도대교가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진도대교가 놓인 곳은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물의 흐름을 이용해 13척의 전함으로 왜선 133척을 궤멸했다고 하니 조류의 흐름이 어떠하겠는가? 양쪽 해안에 교각을 세우는 작업이 가장 난공사였다고 한다. 교량의 기반이 되는 파일을 박고 콘크리트 구조물을 세웠지만 조류에 휩쓸려버리고 마는 시행착오를 거치느라 5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 공사를 그만두지 못한 것은 그 곳만이 섬사람들의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 나는 신문지상을 통하여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월영교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월영교는 조선시대 어느 부부의 각별한 사랑을 모티브로 놓인 다리라고 한다. 이른바 ‘원이 엄마의 사부곡’으로 알려 진 사랑이다. 1998년 안동시 택지개발 때 고성이씨 무덤 속에서 한 남자의 시신과 함께 한 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한다. ‘원이 아버지께’로 시작된 이 편지는 1591년 6월 1일에 작성된 것이었다.

    “당신, 나와 함께 둘이서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죽자하였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먼저 가시나요. 어린 아이들은 누구의 말을 듣고 살라고 먼저 가십니까.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와 같을까요? 이 편지 보시고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지아비를 그리는 아내의 사연은 절절하게 이어졌다. 편지만 발견된 것이 아니었다. 병으로 먼저 떠나보내기까지 남편의 쾌유를 빌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엮은 미투리도 한 켤레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세상에 공개되자 사람들은 이승과 저승을 잇는 깊은 사랑에 눈물을 훔쳤다. 안동시에서는 이 이야기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2001년 10월에 착공하여 1년 반 만에 월영교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목책교로는 국내에서 가장 긴 다리라고 한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다리, 그것은 소설이나 전설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존재하고 있다. 달빛이라도 은은하게 내리는 날이면 ‘원이 엄마의 사부곡’이 메아리가 되어 들려오는 듯 가슴이 서늘해 진다고 한다. 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찾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건너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믿음 때문에 아베크족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은 마을 앞 어디를 가나 찾을 수 없는 징검다리를 전국적으로 여러 곳에서 복원하고 있다. 물론 잃어버린 옛날의 정취를 살려보고자 함이리라. 그리고 도심 속의 하천이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으로 재정비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천주변에 화훼단지를 조성하고 정자를 짓고 곳에 따라서는 물레방아를 재현해 놓고 있는 곳도 있다.

    얼마 전 친목단체의 모임이 파주시에서 있을 때였다. 파주시의 명물로 알려진 공릉천의 징검다리를 찾을 기회가 있었다. 마침 주말이어서인지 공릉천의 시민들은 건강다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속보로 걷는 사람, 줄넘기를 하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캔버스 위에 공릉천의 풍광을 담고 있는 화가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너무 손질된 인공미 탓인지 자연스러움이 덜해 보였다. 나는 바지를 걷어 부치고 몇 번 징검다리를 건너보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아니었다. 그 옛날 발가락을 간질이던 붕어, 피라미떼도 보이지 않았고 먹이사냥을 하는 물새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추억 속의 나는 어디로 가버리고 회귀할 수 없는 시간들만이 유속을 따라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

    <저작권자©참살이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3-04-24 07:54 송고
    다리에 관한 추억 / 시인 송 준 용
    최근기사
    새 배너 뉴스앵키
    참살이소개 | 광고/제휴 안내 | 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방침
    참살이뉴스 사업자등록번호 : 416-14-38538 / 등록번호 : 전남 아 00078 / 발행일 : 2008년 6월 1일
    전남 순천시 연향동 장자보3길 28 T : 061) 746-3223 / 운영 : 김옥수 / 발행 ·편집 : 김용수 / 청소년보호책임 : 김영문
    yongsu530@hanmail.net yongsu530@naver.com Make by thesc.kr(scn.kr)
    Copyright 참살이뉴스. All Right R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