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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의 남은 시간
이영범 / 영암고등학교 1학년 2반  
2012-04-02 오전 7:01:00 참살이 mail yongsu5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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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나 셋이서 살았다. 아빠는 두 달에 한번 꼴로 찾아오셨고, 엄마는 얼굴도 모른 채 그렇게 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랑 사는 생활은 평온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쓸쓸했다. 가족들의 얼굴로 쓸쓸함을 채우고도 넘치는 명절이 기다려지곤 했다.
     2005년 기다리던 설이 왔다. 하지만 그해 설은 어둡기만 했다. 가족들이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즐겁게 보내던 설에 할머니께서 쓰러지신 것이다. 가족들은 놀라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할머니에게로 몰려갔다. 일순간 아득한 불안이 가족들을 엄습해 옴과 동시에 가족들은 황급히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셨다. 병원으로 가는 자동차의 뒷모습을 나와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불안함 속에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할머니는 가족들의 부축을 받고 표정없는 낯선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셨다. 가족들은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걱정을 하며 어서 입원을 하시라고 몇 번이고 설득을 해 보았지만 할머니는 힘없이 아픈 몸으로 한사코 입원하시기를 마다하셨다. 결국 가족들은 할머니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암울했던 설이 지나고 할머니는 병을 안고 집에서 3달 간 지내시다가 결국 입원하시게 되었다. 나는 주말마다 할머니가 입원하신 병원으로 찾아갔다. 그래도 낯선 병원에서 보는 손자라고 할머닌 내가 갈 때마다 얼굴에 옅은 미소가 잔잔히 깔리셨다. 그런데 어느 날 토요일 학교에서 끝나고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려는데 버스를 한번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2시간 정도 늦게 병원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뭐하느라 이렇게 늦게 왔냐느니, 할머니는 이렇게 아픈데 어딜 싸돌아 다니냐느니, 정신이 있냐없냐 하시며 심한 꾸중을 하셨다. 옆에서 병간호를 하고 있던 고모가 씁쓸히 웃으며 나에게 “할머니가 아프니까 예민하셔서 너한테 그러는거지 절대 네가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다.”라며 할머니의 입장을 설명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할머니는 낯선 병원에서의 생활 그리고 큰 병을 가지고 계서 안 아픈 날이 없는 하루하루 그 힘든 상황에서 그래도 이틀간 만나는 손자와의 시간이 많이 반갑고 기다리셨던 것 같다.
     한 달 후 여름방학이 왔다. 나는 할머니가 입원해 계시는 병원에서 방학기간 동안 지내게 되었다. 할머니는 밥을 많이 드실 수 없어서 병원 밥이 나오면 거의 먹지 못하시고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저녁이면 병원 밥은 심심하시다며 근처 가까운 추어탕집으로 가서 1인분을 시키시고 또 얼마 드시지 못하시고 나에게 남겨 주셨다. 추어탕은 정말 맛있었지만 잘 드시지 못하는 할머니 때문에 추어탕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허기가 졌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추어탕은 정말 맛있었다. 나중에 그 병원 근처에 가면 꼭 다시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혼자 그 추어탕을 먹다 할머니 생각이 나서 울지도 모르겠지만.
     그 병원에 있는 동안 나는 너무 심심했다. 처음 며칠은 병원이 신기하고 생소한 곳이라 재미도 있었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성격상 나는 가만히 있질 못하는 성격이여서 할머니 옆에서 조용히 지키는 병간호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거리로 나가 놀만한 데가 없나 찾아 보았다.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문방구가 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작은 오락기계가 2-3대 있어서 재미있게 놀만했다. 그 곳을 발견한 후 나는 매일 낮이 되면 할머니에게 몇 천원씩 받아서 그 곳에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나중에는 할머니가 주무시고 계시는 사이 할머니 지갑에서 몰래 천원씩을 더 빼가기도 했다. 병원에서 지낼 때 지루함 말고도 할머니가 통증을 호소할 때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할머니 옆에서 등을 두드려 드리는 것뿐이었다. 할머니의 아파하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 병실을 뛰쳐 나오기도 했다.
     개학을 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2주일쯤 지났을까, 할머니께서 집으로 돌아 오셨다. 병이 호전되지도 않은 할머니께서 왜 돌아오셨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위암 말기로 수술을 하실 수도 있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고 했다. 만약 성공한다고 해도 할머니는 위만 나쁜 게 아니라 다른 부위들도 안 좋으셨기 때문에 오래 사실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은 시간 동안 집에서 편히 보내고 싶다고 하셔서 집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희망이 없었다. 그래도 할머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남은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할머니와의 남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할머니의 집에 자주 모였다. 행복했었다. 가족들이 모인 시간만큼은 모두 웃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행복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검은 색 토를 자주 하시더니 위독하신 상태에서 할머니는 다시 입원하시게 되었다. 할머니가 입원하시고 나는 정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제 그 남은 시간이 거의 끝나간다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가 없는 방에서 자려고 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걱정되었다. 희망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엇지만 지금까지 함께 살았던 할머니가 곁에서 완전히 떠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하느님 제발 우리 할머니 안 아프고 오래 살게 해 주세요. 제발 그 병 낫게 해 주세요. 나 할머니 없이 어떻게 살아요. 아직 할머니한테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해 드렸어요. 제발 우리 할머니 살려 주세요. 제발...” 하며 기적이 일어나기를 몇 번이고 기도를 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침 6시경에 고모가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며 할아버지와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병원으로 가는 도중 고모가 말한 위독하시다는 말을 나는 잘 이해를 못했다. 할머니는 원래 위독하셨기 때문에 오늘이야 무슨 일이 있겠냐며 불안을 떨쳐냈다. 그러나 할머니를 보자 그 불안은 일순간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가족들은 할머니가 누워 계신 침대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고모는 할머니가 새벽부터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하셨다고 했다. 할머닌 정말로 앞을 보지 못하셨다. 가족들 한사람씩 할머니 얼굴 가까이로 가 할머니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내 차례가 왔다. 그래서 난 할머니에게 다가가 할머니 얼굴을 보았다. 할머니는 확실히 앞을 보지 못하셨다. 할머니의 눈동자는 나의 얼굴을 향하지 못하고 천장 어딘가를 보시기만 하셨다. 나는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인데, 무슨 말을 해야겠는데,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그래서 멍하닌 서서 할머니만 보고 있는 나에게 어른들이 할머니의 손을 잡으라고 시키셨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할머니, 저예요.”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편안히 웃으시며 “그래, 영범아”라고 하셨다. 나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분명 할머니를 보고 있는데 할머니는 나를 보지 못하시고 그저 손만 잡으시고 멍하게 웃고만 계셨다. 진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흘렸다. 그런 할머니가 너무 불쌍했다. 정말 안타까웠다. 분명 매일 봐 왔던 할머니의 얼굴인데 왜 지금 보는 할머니의 얼굴은 내가 보던 얼굴이 아닌 것 마냥 낯설고 불쌍하게 느껴질까. 이번이 마지막인데 할머니는 왜 나를 보지 못하실까 나는 이렇게 할머니를 보고 있는데..... 그렇게 나는 내 마음속에서 나오는 말을 할머니에게 하지 못하고 병실을 나와 휴게실에서 정말 피할 수 없는 할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할머니와 지냈던 모습들이 떠오르면서 이제 할머니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나에게 할머니의 죽음은 다가와 버리고 말았다. 친척 동생이 나에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며 빨리 병실로 오라고 했다. 나는 믿지 않으려 했지만, 밀려오는 불안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병실에 들어갔을 때는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막내고모의 통곡과 다른 가족들의 침묵과 울먹임. 나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나에게는 엄마였던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나의 할머니를 다시는 볼 수 없음에 정말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현실이 아니길 꿈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할머니를 잊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꿈 속에서 할머니가 나타났다가 유유히 사라지는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는지도 잊어버리고 할머니가 어디 가셨지? 빨리 찾아야 하는데, 하다가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하염없이 울며 괴로워했다. 결국 1-2년이 지나고 그제야 할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할머니를 내 안에서 놔 줄 수 있었다.

     “할머니, 계신 곳은 편안하신가요?
    편안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지금 여기서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저 벌써 18살이 되었어요. 키도 180을 훌쩍 넘었어요.
    보여드리지 못한다는 게 너무 아쉬워요. 보셨으면 분명 좋아하셨을 텐데.
    할머니, 저는 할머니와 보냈던 옛날을 추억하며 그 슬픔을 덜기도 하면서 더하기도 합니다.
    옛날을 추억하면 비록 제가 할머니의 속만 썩혀드려 죄송하기도 하지만 지금에야 더욱 절실히 느낍니다. 할머니가 저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셨는지 왜 그땐 그렇게 할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못된 짓만 했는지 후회가 됩니다. 그래도 할머니와 함께 했고 또 행복했던 그 순간순간들을 떠올리면서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그저 가슴 한 곳에 묻고 빛나던 그 순간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할머니 지금에야 말해서 정말 죄송해요. 할머니, 정말 사랑해요.”

     살아계실 때 할머니께 못되게 굴고 할머니를 힘들게 했던 일들 때문에 효에 대해 말하기가 부끄럽다. 돌아가시고 난 후에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도 안다. 비록 돌아가셨지만 살아계실 때 못해드린 것을 후회하면서 돌아가신 부모님과 있었던 행복한 일들을 추억하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늘 반성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어리석다 할 수 있겠지만 못다한 마음을 전하는 길이 아닐까.
     누가 나에게 살면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돌아가신 할머니와의 행복했던 옛날을 추억할 수 있게 해 준 할머니에게 감사하며 살 수 있는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고 싶다.

    <저작권자©참살이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2-04-02 07: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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