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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말모 선생이 쓴 “이산 아리랑”을 읽자 / 김용수

2013-12-19 오전 12:11:56 참살이 mail yongsu530@hanmail.net

     

     

    김용수편집국장

     


    대한민국 민족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역사서와도 같은 한 인생의 절절한 삶이 책으로 출간됐다. 뼈아픈 사연과 처절한 민족의 아픔을 담고 있는 “이산 아리랑”은 구말모 선생의 자서전이라고 하기 이전에 “겨레하나 되기”를 염원한 우리민족의 필독서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구 선생은 말한다. “이산 아리랑”을 쓰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고 “이산 아리랑”을 부르지 않고는 이산가족의 한을 표출할 수가 없었다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나 일본에서의 냉대와 북쪽에 누이를 둔 이산가족의 아픔을 몸소 겪으며, 살아온 그였기에 더욱더 애절했었다고 한다.


    특히 구 선생은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 41년 동안 ‘간첩’이라는 누명을 썼고 벗었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이산 아리랑”은 출판되어야만 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던 구 선생의 심정은 글이나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어떻게 형용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구 선생은 책머리 말에서 자신의 소감을 밝혔다. “이 책은 내가 서대문형무소와 대전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할 때의 단상들이다. 나는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감옥 안에 갇혀서도, 감옥 밖에서 살고 있어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준 재일교포 3세인 내 딸의 권유에 의해서, 나를 사랑한 아내에 의해서, 나를 사랑한 지인들에 의해서도 마지못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가 이 책을 써야만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 41년 동안 간첩 누명을 썼고, 간첩 누명을 벗었다는 것을, 대한민국 사람이면 모두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나의 평생소원인 한일 간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세 번째는 이산가족 자유상봉과 남북통일을 위한 지침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네 번째는 왜 죄 없는 선배들이 역사의 희생양이 되는 비극을 겪어야 했는지 초중고생, 그리고 이 땅의 자녀들이 교육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온 국민의 사상과 철학부터 통일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 책을 내게 된 것이 진심인지 모른다.”고 했다.


    게다가 구 선생은 “겨레에게 바친 목숨 중에서”라는 육필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한국인 2세이다. 치욕적인 한일합방 이후, 한국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동료들과 함께 일본 아이들에게 조센징이라는 멸시를 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서는 날마다 허리와 마음과 정신에 칼을 차고 다니라는 무사도(武士道)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는 한국인의 본때를 보여 주리라 굳게 결심하고 조선(朝鮮)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비수로 꽂고 다녔다. 나라는 되찾았으나 남과 북이 분단되어, 일본인에게 소외를 당한 재일교포들을 모두 애국 애족하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선구자가 되기 위해서, 열혈 애국 청년이 되기 위해서는 차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날마다 건강한 육체로 건강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일본의 명문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대사관 사증 담당직도 마다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내 나라 내 땅에서 남은 공부를 마무리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자, 대한민국을 찾아온 나는 가슴이 벅차서 잠을 설쳤다. 그때 연세대학교 교정은 참으로 아름답고 따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멸시와 천대를 받지 않은 지상낙원이었다. 사랑과 평화가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들을 보내며, 국민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동안,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죄명으로, 감옥에 갇히는 날벼락을 당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사나이 가슴에 두 번이나 대못을 박아 주었다. 나라 잃은 설움을 준 조국, 3·8선을 그어 놓고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준 조국은 나에게 슬픔을 주었지만, 대한민국 뿌리를 갖고 태어난 나는, 조국을 버릴 수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바다 ‘해(海)’ 자, 봉우리 ‘봉(峰)’ 자로, 바다에서 가장 높은 우두머리라는 뜻의 해봉(海峰)이라는 호를 묵묵하게 지었을 뿐이었다. 감옥에서 나가기만 하면, 현해탄을 오고가며 한일 간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선구자가 되고 싶어서였다. 남북통일, 원 코리아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는 새 길이 되고 싶어서였다. 그때 감옥 동지들은 나를 해봉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해봉(海峰)이라는 호에 걸맞지 않게 불법 구속, 감금, 장기간의 징역살이에 시달려 병신이 되었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갈수록, 눈빛만이 시퍼렇게 살아남은 나는 하느님께 빌었다. 나로 인하여 한일 관계를 개선시켜 재일교포 2세, 3세 등이 더 이상 한국인(韓國人)이라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만 목숨을 연장시켜 주옵소서. 겨레를 위하여 남은 生(생)을 바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했다.


    참으로 처절하고 비극적인 구 선생의 삶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누구를 탓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불굴의 정신으로 오직 겨레하나 되기만을 기원했다. 이산가족의 한을 달래며 통일된 조국과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하고 있다.

      

    필자가 구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은 ‘2013순천만국제박람회’의 일본홍보대사로 일본관광객을 비롯한 재일교포유치와 예술행사를 치룰 때였다. 그의 인품에서 풍기는 애국, 애족, 애민정신은 실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었으며, 소신과 철학은 확고했었다. 그래서 필자는 선후배를 떠나 형제지간의 우애를 맺기로 했다. 뒤늦게 맺은 인연이었지만 진실성과 소중함을 배우며 ‘겨레하나 되기’에 동참키로 했다.


    아무튼 구말모 선생이 쓴 “이산 아리랑”은 재일교포의 쓰라린 일본생활을 비롯한 이산가족의 아픔들이 담겨있다. 더욱이 분단된 조국으로 인한 억울한 문제점들이 기록된 대한민국의 애절한 필독서다.

    <저작권자©참살이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3-12-18 15:33 송고 2013-12-19 00:11 편집
    구말모 선생이 쓴 “이산 아리랑”을 읽자 / 김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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