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과 민족을 위해 숨은 공을 세워놓고도 음해의 파도에 휩쓸려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던 재일교포 2세의 한마디가 야윈 가슴을 파고든다.
강명운씨, 그는 재일교포 2세로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현재 순천 청암대학교 총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수많은 악성루머에 시달리면서 음해의 파도를 넘어선 오늘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재일의 혼’을 피력했다.
그는 “국민들은 국가가 무엇을 해주길 바라기전에 자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케네디 연설문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현해탄을 넘어 고국으로 왔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재일코리안 연구소”를 2년 전에 설립했었다. 그리고 재일동포의 조국공헌사업을 발굴, 체계화했다. 100년이 넘는 재일동포의 역사를 근대민족사와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일부로서 현창하고 싶은 심정에서 정열을 불태웠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심경은 산뜻하지 않았다. 조국의 정치흐름이나 사회풍토가 자신들의 영달에 편승한 나머지 재일동포의 ‘재일의 혼’이 사장되었을 뿐 아니라 기여도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다.
상기해 보자. 우리나라는 건국 65주년을 맞은 지금, 국민소득 2만 달러로 경제대국이 됐다. 아마도 그 시발점은 재일동포들의 ‘재일의 혼’이 작용했으며, 우리나라 새마을정신으로 이어졌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슬프게도 재일동포의 ‘재일의 혼’은 거론되지도 않고 있다. 한국의 현재의 모습은 재일동포들의 조국사랑에서 비롯된 ‘재일의 혼’과 기여도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었고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65년의 한일국교 정상회 이전부터 조국인 한국으로 자본은 물론 기술과 경영노하우를 제공했다. 그중에서도 구로공단은 재일동포들의 발의로, 65년부터 가동돼 80년도 중반까지 전 수출액의 10프로를 차지해 ‘한강 기적’의 첨병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뿐 아니다. 60년대 고도경제성장 이륙기 후에도 재일동포의 조국공헌은 일관했다. 농업 등 지방경제를 추진한 70년대 새마을 운동지원, 88올림픽에 100억 엔을 상회하는 성금전달, 97년 IMF 위기 때 외화송금 운동 등은 우리경제에 큰 획이 됐다. 또 한국을 대표하는 신한은행은 재일동포들의 100프로 출자로 이뤄졌다.
이외에도 재일동포들의 조국공헌들은 많이 산재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온 국민들이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장되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고 서글프다. 그래서인지 강명운 청암대학교 총장은 “재일코리안 연구소”를 1세대인 조상의 땅에 설립했고 육영사업에 심혈을 쏟아 붓고 있다.
그렇다. 그는, 재일동포 1세대인 강길태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애국, 효도, 자립의 정신을 계승하고 육영사업을 발전시키리라 믿는다. 그것은 한국의 수많은 대학 중에서도 54년에 설립한 도립순천간호고등기술학교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재정적자로 폐교의 위기에 놓여 있는 학교를 지역주민의 열망에 부응해 경영을 인수한 이후 오늘에 이르러 신뢰감을 쌓였다.
현재 청암대학은 매년 실시된 전국전문대학총합평가에서 우수한 대학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게다가 2009년도에는 한국생산성본부, 조선일보, 미국의 미시건 대학의 공동에 의한 ‘국가고객만족조사’ ncs에서 남강대, 고려대, 한국외대 등에 이어 7위에 링크되어 있다.
아무튼 그는 쓰라린 조국풍토성 음해의 파도를 넘고 “재일코리안 연구소”를 통해 재일동포들의 ‘재일 혼’과 기여도의 체계화 된 역사를 정립시키고 있다. 특히, 날로 발전하는 조국의 경제력과 육영사업에 원동력을 지니고 있는 재일동포 2세로 조국의 부름을 알고 있는 교육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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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9 13:20 송고
2014-02-19 22:30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