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이다. 감사함과 은혜로움이 가득하다. 이브의 밤을 즐기려는 청춘남녀들의 계획성으로 순천만 갈대밭이 붐비고 있다. 저녁시간이 다가오면서부터 대대포구를 찾는 연인을 비롯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삼삼오오 짝을 이룬다.
가끔씩 들려오는 교회와 성당의 종소리가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왠지 처량하면서도 쓸쓸함이 번진다. 은은하게 들려야 할 종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오는 것은 시국이 어수선해서 일까? 아님 송년의 아쉬움 속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소외계층의 삶을 걱정해서일까? 즐거워야할 성탄절이 무겁게만 느껴지면서 추위까지 몰려온다.
이런 날에는 학창시절에 감명 깊게 읽었던 까뮈의 작품들이 생각난다. 페스트라는 작품에서 페스트에 고립된 마을과 목사 그리고 의사의 이야기들이 하얗게 그려진다. 까뮈가 추구했던 인간의 비리와 정의 그리고 심리가 잘도 묘사되었지 않았나 싶다.
어찌 보면 까뮈는 이미 서구 중심적 근대성의 신화에 회의하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볼 수 있는 여러 현상과 공산주의 체제에 나타났던 여러 현상이 서구를 중심에 둔 근대성이라는 신화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이라고 지적했던 점에 대해서 말이다.
게다가 모든 '절대성'이란 결국 그 절대적 정당성을 믿는 집단이 권력을 쥐게 되었을 때 타인에게 폭력과 억압을 휘두르기 위한 준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진보'라는 개념에 대한 맹신을 버리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이성에 대한 믿음을 지속하는 일이다. 인간의 존재조건 자체가 불합리한데 그런 인간들이 모여 만든 사회가 어떻게 완전하게 합리적인 질서 속에 통일될 수 있겠는가?
어느 시대든 당대에는 단지 당대의 문제가 제시될 뿐이고,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유만이 있을 뿐이다. 죽음으로 마감하기 전까지 어떤 개인의 생애도 완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 또한 끝나기 전까지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까뮈는 이방인에서도 뫼르소를 통해 모든 고결한 혼들은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법을 작품으로 나타냈다. 그 누가 인간에게 허용되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를 한정할 수 있겠는가?
글쎄, 오늘 인생의 근원적인 부조리를 거부하거나 외면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자신은 현실에서 결코 영원히 소외돼 있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정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또 몇 사람이나 될까?
어쩌면 군중 속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사람이 다락방에서 홀로 책이나 읽고 있는 사람보다 더 소외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민주시민들에게 까뮈의 철학과 사상은 강한 호소력으로 다가온다. 까뮈는 인간의 삶과 사회의 부조리를 철저히 깨닫고 반항해 나가는 인간, 즉 본질적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상을 제시했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 인간의 본연의 자세는 자유를 추구하는데 있는지도 모른다. 자유가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인간의 휴머니즘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물음표는 당연하다. 어쩌면 우리 인간사회의 삶은 情이 아닐까 싶다.
성탄절을 맞은 순천만 갈대밭에는 각종 정이 꿈틀거리고 있다. 남녀 간의 애정에서부터 조건 없이 주는 사랑까지 널려있다. 아마도 갈대의 흔들거림도 예사롭지 않는 곡예사의 사랑을 노래하는 듯하다. 게다가 갈대의 부대낌의 소리도 황혼의 서글픔을 사랑으로 감싸고 있는 성 싶다. 성탄절을 맞은 순천만! 그 순천만정원에서 갈대가 노래하고 파도가 베푸는 대자연의 속의 새로운 정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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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3 15:06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