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수 편집국장
“전남 순천낙안읍성의 은행나무 ‘유주’를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최근 들어 낙안읍성 은행나무와 유주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민을 비롯한 세인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개혁도시와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낙안읍성의 또 다른 문화를 찾아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낙안읍성의 역사와 풍습을 지금까지 지켜온 문화유적유물은 많다. 모두가 무생물이다. 하지만 낙안읍성의 은행나무는 성안에 뿌리를 내리면서 500년 이상의 세월을 묵묵히 버텨온 살아있는 생물이다. 성장과정은 차치하더라도 모진풍파를 견디고 살아온 흔적들이 훈장처럼 달리고 있기에 더욱더 진귀한 선물로 여겨진다. 그중 하나가 ‘유주’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여성의 젖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역사적 생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부터서라도 애정과 함께 정성스런 보살핌이 뒤따라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은행나무의 젖 기둥으로 알려진 “乳株”는 우리나라에서 몇 그루 없다고 한다. 선운산을 비롯해 성균관대학교와 청도 적천사, 서산 향교의 은행나무는 전설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게다가 희귀성까지 띠고 있어 학계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그래서 일까? 유주를 달고 있는 타 지역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로 등록되었거나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낙안읍성 은행나무와 ‘유주’는 세인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낙안읍성 은행나무와 ‘유주’에 관해서는 국민모두가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장군의 전공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호남의병활동상의 참역사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낙안읍성 은행나무와 ‘유주’에 관해 연구하거나 논해본 사람은 없었다. 뭔가 잘못된 시각차이가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의병과 식량을 모으려고 낙안읍성에 들렸으며, 낙안읍성은행나무 밑에서 잠시 쉬면서 많은 전략을 생각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안읍성 은행나무와 ‘유주’의 유래를 모르고 있다는 것은 역사의식의 결여로 여겨진다.
그런 까닭일까? 낙안읍성 안에 아름드리은행나무 몇 그루가 돛대처럼 솟구쳐 자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유주’를 달고 있는 은행나무는 2주 뿐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야 ‘유주’가 열린다는 이야기가 말해주듯 낙안읍성의 은행나무는 역사성이 깊다. 우뚝 선 버팀목으로 세월항해를 하고 있는 낙민호와 같다. 때로는 조국수호의 안식처로, 때로는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기도처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낙안읍성 은행나무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김빈길 장군이 토성을 쌓을 때 심었으므로 800년이 넘었다는 설이 있는 반면 임경업 장군이 석성을 축조할 때 심었으므로 500년 설이 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더러는 800년 수령을 지녔다는 사람도 있고, 일부 학자는 500년가량의 수령을 추측하기도 했다.
아마도 낙안읍성 은행나무는 김빈길 장군이 토성을 쌓을 때부터 존재했었다는 설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 방증은 높이30m, 둘레10m 배의 돛대형상을 지녔으며, 읍성에서 가장 큰 거목으로 신목이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허 석(현 순천시장)설화작가는 임진왜란 당시에 이순신 장군이 의병과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그때 이 나무를 지날 즈음 마차의 바퀴가 빠져 지체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수해로 인해서 인근의 다리가 무너졌다고 한다. 이 때에 만일 지체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면 의병과 군량미가 모두 휩쓸려 갔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연유에서 이 나무를 신목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필자역시 낙안읍성 은행나무와 “유주”의 역사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낙안읍성 은행나무와 “유주”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보았지만 필자가 알고자 하는 내용은 없었다. 하는 수없이 낙안읍성을 탐방한 나머지 그곳 은행나무와 유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민 한사람을 만났다. 그는 다름 아닌 낙안읍성 동내마을에 살고 있는 김철선씨로 조선시대의 우리의 얼과 풍습을 계승발전 시키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또 그는 서각과 골동품을 수집하는 장인이었다. 틈나는 대로 낙안읍성에 소재한 정자의 현판 등을 서각을 해서 걸어두는 등 잡다한 일들을 찾아서 하는 일꾼이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낙안읍성을 두루 구경하면서도 은행나무신목에 “유주”가 자라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다고 했다. 낙안읍성은행나무의 유주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며, 알고 있다하더라도 은행나무신목의 유래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단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저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라고 생각할 뿐, 역사성과 그 거목에 얽힌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김해중 낙안읍성관리소장은 “낙안읍성 은행나무와 ‘유주’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며 “낙안읍성역사성을 표방한 은행나무거목과 유주를 널리 알려야겠다.”고 했다. 게다가 김 소장은 이순신 장군과 연관된 팔진미비빔밥과 낙안팔경 등 역사, 문화, 예술발전에 힘을 모을 때라고 말했다.
뒤늦은 감은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서라도 “유주”가 달린 은행나무와 이순신 장군과 연관된 이야기를 계승발전 시켜야한다. 정사와 야사를 통합해서라도 그날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당시의 크고 작은 일들을 들춰야 한다. 그래야지만 낙안읍성의 역사관이 바로 설 것이며, 내일을 위한 발길이 올바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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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4 09:03 송고
2020-12-14 09:03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