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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시인, 화순문학제 "특강"
원효문풍과 적벽풍류에 대한 특별강의로 역사재조명해야
2014-10-30 오전 9:42:44 참살이 mail yongsu530@hanmail.net





    전라도 판소리가락을 지니고 우리나라 서정시의 큰 획을 긋고 있는 송수권 시인이 ‘전남 화순문학제’에 참석해 특강을 했다.


    지난 24일, 화순문학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서정시를 대표하는 송수권 시인을 초청해 원효문풍과 적벽풍류에 대한 특별강의를 했다고 밝혔다.


    이날 이 자리에는 각 기관단체장을 비롯해 화순문학회원과 많은 지인들이 참석했으며, 호남문학의 정서와 역사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고 ‘화순문학제’를 빛냈다. 


    특히 송시인은 우리나라에서 호남학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원효문학과 적벽풍류를 빼 놓을 수 없다며 16세기를 전후하여 남도에는 많은 누각들이 창건되었는데 그 가운데 무등산을 동서로 양분해 원효계곡과 적벽강을 중심으로 한 정자들이 많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윤예주 화순문학회장은 “원효문풍과 적벽풍류를 화순문학제를 통해 특강해 주신 송시인에게 감사함을 전한다.”며“지금이라도 계산풍류를 원효문풍으로 한정하는 국문학사관은 수정돼 적벽풍류까지를 포괄해야 한다는 것에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송시인의 특강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남학(湖南學)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원효문풍과 적벽풍류를 빼놓을 수 없다.
    16세기를 전후하여 남도에는 많은 누각들이 창건되었는데 그 가운데 무등산을 동서로 양분하여 원효계곡과 적벽강을 중심으로 한 정자들이 많다.


    흔히 남도풍류와 가단(歌壇)을 말할 때 이 땅의 문풍(文風)을 계산풍류(溪山風流)라고 지칭하고 계산풍류를 말할 때 면앙정과 성상가단을 말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다시 뒤집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동서분쟁이 걸쳐있어 조심스럽게 제기해야 할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덮어놓고 이 땅의 문풍(文風)을 계산풍류로 한정할 때 원효문풍만이 전부인 것처럼 규정할 때는 큰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 문제를 착안한 것은 남도기행을 쓰면서 정여립사건을 추적하고 나서다. 즉 기축사화가 다름 아닌 동인과 서인의 정권쟁탈전으로 전개되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남평의 동인인 이발(李潑)과 서인의 정철(鄭澈)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 기축사화(기축옥사)로 인한 싸움으로 이쪽 공간은 많이 끌쩍거려졌고 이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은 선비만도 천여 명이란 숫자를 헤아린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의 집권세력 다툼에 있어서 그 규모가 오늘의 광주항쟁 못지않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전모를 여기서는 생략하고 여러 선학께서 아직 한 번도 언급하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적벽풍류>에 대하여 소견을 말해보고자 한다.


    특히 계산풍류와 적벽풍류를 지금쯤 거론할 수 있는 까닭은 석천집(石川集)과 광산 이씨 문중사담집(門中史談集)이 간행되어 그 자료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계산풍류를 언급하고 있는 석천집은 임억령의 후손인 임용주 박사에 의해 정리되었고 광산 이씨 문중사담집은 동암 이발의 후손인 이재수(李載洙)씨의 손에 의해 정리되었다. 이 두 자료를 비교 검토할 시간은 충분치 않았지만 마침 이재수씨와 평소 친교가 있는 터라 그가 소장하고 있는 동암(東岩) 남계(南溪)의 <적벽화답시>를 입수할 수 있었다.


               방초는 두터워 융단 같고
               청산은 아득히 연기와 같네
               그대와 같이 오늘 취하니
               만사는 오직 하늘에 맡기네
               동암 나는 적벽에 취하여 누었으나
               남계는 살찐 고기 잡아오네
               오직 이를 자모께 드리면 조금이나마
               봄빛 같은 은혜 갚으리


    위의 시는 동암 이발이 남계(이길)인 동생과 적벽강을 타고 놀면서 쓴 <유적벽>이란 시다. 아마 형제간에 놀면서 흥이 도도하여 휘갈겨 본 광초(狂草)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한 남계 이길의 화답시는 다음과 같다.


               흔들리는 강위의 배여 만사는 동류수 따라 흘러가네
               오늘 저녁은 또 어떤 저녁일고 어버이 아직 여기 계시네
               취함에 돛대 두들기며 돌아오니
               그대는 아는가 내 누구인가를


    그런데 이 화답시는 원문 2절이 유실되어 있다. 동암의 광초로 응수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재수씨의 기우대로 원문 2절은 거침없는 시국담으로 정려립사건에 연루되어 화근이 있을까봐 없애버렸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위의 ‘그대는 아는가 내 누구인가를’은 문투로 보아 형에게 무엇인가 호방한 뜻을 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원래 동암 가계가 절손되는 위기를 맞았음으로 현재까지 발굴 된 것은 이발의 수간(手簡)과 오직 이 화답시 뿐인데 천만다행으로 이재수씨가 충남대학교에 있을 때 대전의 고서점에서 입수한 것이다.


    문중사담집엔 당시 적벽강에 와서 놀았던 시인묵객들의 시가 상당량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적벽풍류는 무등산의 북서쪽 계곡인 원효문풍과 대조를 이루면서 성하였던 듯하다.


    특히 설월당(雪月當) 김부륜(金富倫)이 동복현감으로 와 있던 그 재임 시에 절정을 이루었던 듯하다.

    설월당은 1530-1598년까지로 약관에 퇴계의 문학에 들어갔고 그 신임이 두터워 만년에 음관(蔭官, 조상의 공덕으로 추천을 거쳐 얻은 벼슬)으로 발탁되어 동복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가 부임하여 몇 년간을 재임하였는지는 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하여튼 그가 재임 시에 각별했던 사이로 동암을 비롯한 많은 동인들의 출입이 있었던 듯하다.


    기축옥사는 1598년 12월에 일어났는데 그해 4월 중순에 동암이 적벽에서 놀면서 그에게 봉헌한 시는 다음과 같다.


               산 숲속에서 노니노니 만사가 한가하구나
               바위 위의 하내비가 시네 위의 하내비를 이끄네
               우리들 마음 알아주는 설월 노인이 계시니
               논담을 하고 돌아와 생각하니 옛사람의 풍도를
               따르는 듯하구나


    대강 이런 뜻이 될 터인데 동암과 남계가 곧 시에 나오는 암반옹(岩冸翁)과 계상옹(溪上翁)일 것이라고 이재수씨는 추측한다.


    이 시의 제목이 증설월당(症齧月當)인 것으로 보아 동암이 설월당에서 봉헌 한 시 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 원본과 말미에 기축 4월 당산후인 동암 이발, 정암(이발의 자) 필봉으로 되어있어 기축옥사가 일어 난지 불과 여덟 달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뒤에 든 동암과 남계의 화답시 또한 이 무렵에 쓴 시가 아닐까도 추측이 되기는 한다. 그렇지만 이 연대는 근거 없는 얘기이므로 증설월당시와 함께 고증이 더욱 필요한 일이다.


    이와 아울러 당시 적벽풍류에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지만 사실은 이 무렵에 적벽풍류가 시작된 것은 아니고 기록에 보아 1482년 성종 13년에 호산(胡山) 이달선의 청심당원운(淸心堂原韗)을 비롯 김팔재, 김종직 등에서 벌써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적벽은 동복수원지 상류로서 물에 잠기어 있지만 이 적벽풍류는 꼭 적벽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설월당이 쓴 지석강상증벌이사인 정함 검상 정연 형제로 보아 남평 지적강 일대에까지 확대되어있다.


    위에 든 정함은 동암을 말함이고 정연은 남계의 아들인 것으로 보아 이들의 사이가 얼마나 가까웠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지석강 줄기에는 능주까지 쳐서 많은 정자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특히 학봉 김성일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경현서원을 다시 일으킨 것으로 보아 이 적벽풍류는 원효문풍과 비교하여 얼마나 위세가 당당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16세기를 전후하여 한 쪽은 적벽풍류 한 쪽은 원효문풍으로 대별된 듯하다.


    아무래도 적벽풍류는 서인 쪽의 학풍이 우세하였고 원효문풍은 시가에 당당했던 듯하다. 인맥으로 본다면 적벽은 퇴계 쪽이요 원효는 율곡 쪽에 가까운 듯하다. 물론 이것은 기축옥사가 바로 동인과 서인의 파당주의에서 나온 산물이었으므로 그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이 원효문풍과 적벽풍류가 어느 땐가는 한 뿌리였을 터이지만 적어도 기축옥사 사건을 빌미로 심한 갈등양상을 나타내고 정면충돌하였음은 가슴 아픈 일이다.


    원효문풍만 보더라도 16세기는 지장의 사림(士林)들이 눈부시게 진출한 시기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석천 임억령이다.


    그는 1544년에는 대사간까지 역임했다. 62세 때 노모를 봉양코자 담양부사로 자임 이곳에서 면앙정 송순을 만난다. 면앙정은 석천과 같은 굴지의 문인인데 그때 노 재상의 몸으로 송순은 기촌에 은퇴해있었다.


    석천이 면앙정에게 바친 많은 시편들이 곧 이들의 우의를 짐작케 한다. 이 때 주목할 만한 사건이 서하당 김성원이 학문을 하기 위해 석천을 찾아온 것이다. 담양부사로 내려간 그해의 일이다.


    성원은 석저촌에 살고 있었는데 이때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고 바로 이곳에 서하당(棲霞堂)을 짓고 스승을 위하여 식영정을 지었다.


    석천이 쓴 식영정기(息影亭記)에는 이 사실이 확연히 나와 있다. 따라서 고등학교 교과서의 <성산별곡>의 참고자료로 밝혀져 있는 식영정이 원래 송강의 정자로 된 것은 오기(誤記)다. 아울러 시가의 산실로 알려진 원효문풍과 적벽풍류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정신적인 고향이기도 하다.


    따라서 필자의 소견으로는 넓게 보아 계산풍류를 원효문풍으로 한정하는 지금까지의 국문학사관은 수정되어야 하며 적벽풍류까지를 이에 새롭게 포괄해야 한다는 점을 제기하는 바이다.

    <저작권자©참살이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4-10-30 07:18 송고 2014-10-30 09:42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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