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수 편집국장
엄마 뱃속에서 자라나
온갖 진통으로 태어나
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땅속의 흙을 헤아리며
삶의 물리를 터득했던
빛나는 친구여!
물속의 결을 헤아리고
바람의 숨을 헤아리며
식은 정과 따순 정을
골고루 나누었었던
빛나는 친구여!
지난날의 싸인 정을 잊을 수 있는가
오늘날의 싸인 정을 나눌 수 있는가
헤어져 있음은 서러운 일이지만
수저를 놓으면 더욱 슬픈 일이라네
가지말소 가지를 마소
쉬어가세 쉬었다 가세
더디게 걷고 느리게 살세
빛난 친구여!
정든 친구여!
쉬어 쉬었다가 가세나
푸르디푸른 잔디밭을 베고 누워
교정시계탑 바라보며 별을 따며
거친 파도 헤쳐 왔었던 친구여!
하늘 날으는 꿈
파도 헤치는 꿈
모두다 접어두고
쉬어 쉬었다 가세
빛난 친구여! (필자의 졸시“빛난 친구여!”전문)
천자암 쌍향수 길을 간다. 아직도 자연의 숨결이 살아있고 그 뭔가를 느끼게 하는 쌍향수 길은 사제의 정은 물론 우정과 애정 등 온갖 정의 길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풀포기에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랑이라는 낱말이 떠나지 않는다.
시인은 말한다. 산사에서 이는 소리는 맑디맑은 영혼의 소리라고 말이다. 새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바람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하는 소리로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소리다. 어쩌면 그 소리자체만으로도 혼미해진 정신이 맑아지면서 피로감도 풀어지지 않을까 싶다.
가끔 필자는 천자암 법웅 스님을 찾는다. 왜냐하면 그의 소탈함에서 비롯된 사람냄새가 좋아서다. 늘 그는 사람들의 땀과 아픔을 논한다. 다시 말해“사람의 몸에서 제아무리 오색광명이 나더라도 중생의 땀과 아픔을 모르면 부처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그에게서 종교를 떠난 인간사를 논하고자 가끔씩 통화를 하고, 시간이 나면 쌍향수 길을 오가고 한다. 식물은 식물냄새가, 동물은 동물냄새가, 사람은 사람냄새를 풍기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요즘은 사람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세태다. 오직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듯싶다. 즉, 인정은 찾아 볼 수 없다는 세상사다.
그러나 여기 천자암에는 인심이 있고 인정이 있다. 그 이유는 법웅이라는 스님의 자리를 내려놓고서 사람들을 맞이한다. 아니 모든 것을 비워두고서 인간사를 논하는 생활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일면을 그려보고 싶다. 그의 진심어린 말 한마디와 실천력을 옮겨본다.
“오는 길이 보통 험한 게 아니지요?”그는 초행자가 천자암을 찾아올 때 힘들음을 죄송해 한다. 그렇다. 천자암 가는 길은 험지였다. 천자암은 송광사 본사에서 걸어서 1시간 넘게 걸리는 오지 암자다. 공양주에게 200만원의 월급조차 주기 어려워 봉사자가 없을 때는 비구승 셋이서 손수 끼니를 해결하는 빈한한 암자다.
그는 2년 전 이곳에 들어왔다. 그가 온 이래 처음으로 천도재비 1천만 원의 시주가 들어왔었다. 코로나19로 더욱 어려워진 암자엔 단비였다. 신자들은 먼저 고장 난 좌변기부터 수리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하나뿐인 수세식 대중화장실에 변이 차서 등산객과 방문객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나 혼자 쓸 화장실부터 만드는 건 도리가 아니다”라며 수십 년 동안 쌓여 엉덩이에 변이 닿을 듯 했던 변부터 퍼냈다. 이어서 위험이 큰 진입로를 시멘트로 포장했다. 탐방객들은 포장길로 천자암에 들어 올수 있게 됐으며 구린내가 아닌 쌍향수 향내를 맡게 됐다. 천도재를 부탁한‘광양 할매’보살에겐“산더미 같은 공양물로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살아있는 부처님들인 대중의 근심을 덜어주는 게 진정한 천도재”라고 설득했다. 이에 보살도 흔쾌히 응하며 퇴락한 요사채 마저 복구하겠다고 나섰다.이후, 그는 쌍향수가 있는 천자암의 애로사항을 곳곳에 알리고 쌍향수의 부식부터 예방했었다. 문화재청이 예산으로 쌍향수 치유를 한 다음 등산객과 탐방객들의 민원까지 받아들여졌었다.
마침내 허석 순천시장은 암자 입구 쪽에 수세식 대중화장실을 건축했다. 또 전남도에서는 좀 더 경사도가 낮은 임도까지 개설했다. 이어 법당 아미타존상 복장에서 370년 전 낙안군의 박명길 가족이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빌며 조성한 기록이 발견돼 지방문화재로 등록했다.
이처럼 그의 활동력은 빛나고 있다. 좋은 일만 일어나는 현상 중에서도 대중들의 안식처로 거듭나고 있는 천자암의 내일은 밝다. 일례로 한철 수행을 위해 천자암에 온 선승 지범 스님도“선방 수좌인(법웅) 스님이 이렇게 대중을 잘 모실 줄은 몰랐다”고 놀라워했다.
지난주였다. 필자는 친구들의 곁을 떠난 형의 빈소를 찾았었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속으로 감추고 “빛난 친구여!”라는 졸 시를 썼었다. 참으로 허망했다. 영의 세계가 있다면 그곳에서라도 만나고 싶었다. 순간 천자암의 법웅 스님을 만나고도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허락지 않았다.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고 운동과 함께 갖은 노력도 했으며 죽음의 세계를 몰아내고 있다.
언젠가는 가야할 길, 그 길은 뜻 모를 물음표가 붙어 다니고 슬픔만이 가득하다. 아마도 자연의 섭리를 모르고 그저 죽음이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일까? 사는 동안이라도 편히 쉬었다가 갈 수 있는 길,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일고 있는 자연의 길, 쌍향수 길을 걸어 봄이 어쩔까 싶다.
<저작권자©참살이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22-01-23 10:43 송고
2022-01-23 10:45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