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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오전 10시 30분 전남 광양시 봉강면에 있는 한 군부대에서 광양문화원(원장 김휘석) 주최 및 주관으로 군부대 관계자, 김휘석 광양문화원장, 이돈구 광양문화원 부원장, 백명현 광양시 재향군인회장, 채혜자 봉강면장, 강대유 진주강씨 광양시종회장, 강순행 전 순천광양 상공회의소 회장, 시민대표 등 약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지역주둔 군부대 명칭을 임진왜란 당시 형제 의병장 구국인물 강희열 장군을 부대명칭으로 정하는 ‘부대명칭 강희열 대대 제정 선포식’개최하였다.
이날 행사에서 김휘석 문화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지역의 구국 역사인물을 군부대 명칭으로 명명하는 것은 선조들의 충의 정신을 기리고 향토애를 더욱 굳게 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동생 강희열(姜希悅) 장군은 형 강희보(姜希輔)와 함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여 장렬하게 전사하신 형제 의병장이다.
임진왜란 형제의병장(兄弟義兵將) 호조좌랑(정6품) 추증 강희보(姜希輔, 1561년생)와 병조참의(정3품 당상관) 추증 강희열(姜希悅, 1562년생)은 광양시 봉강면 신천마을에서 아버지 강천상과 어머니 청풍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무과에 급제한 희열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오는 4대 관문중 하나인 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있는 구례 석주관(求禮 石柱關)에 근무하다가 200여 군졸을 이끌고 경상도 단성으로 가서 호남으로 진출하는 왜적을 막고 있었고 큰아버지 인상도 세 아들과 의병을 거느리고 단성으로 합세했으나 전세가 위험하였다.
이에 희보가 100여 의병을 이끌고 이들을 구한 다음 6월초 먼저 진주성에 입성하고 6월 18일 희열과 사촌 형제들도 진주성으로 합류하였다.
10만 왜군과 4천의 조선군 사이에 9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6월 27일 희보가 먼저 적병의 조총에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니 그때 나이 31세였다.
이틀 후 6월 29일 희열도 사촌형제 2명과 함께 진주성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일가족 4명이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히 순국하니 그 의로움은 만대에 본받아야 할 것이다.
※ 經國大典 吏典 朝鮮 官職表(1468년 1월 1일 시행)
叅議(정3품 당상관), 佐郞(정6품), 別提(종6품), 算學敎授(종6품)
【원고제공 : 광주전남종회 이사, 운영위원, 편집위원 강진원】
【부대명칭 강희열대대 제정 선포식 사진】
1. 강희열 대대 제정 선포식 기념 테이프 커팅사진
2. 강희열 대대 제정 선포식 기념사진1
3. 강희열 대대 제정 선포식 기념사진2
4. 강희열 대대 제정선포 현판식
5. 임진왜란 진주성 싸움과 형제의병장 연혁
6. 강희열 대대 제정 선포식 오찬장 사진1
7. 강희열 대대 제정 선포식 오찬장 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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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03:58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