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계절에 민감한가 보다. 해마다 이맘 때면 봄앓이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지 않아도 봄이 되어 한바탕 꽃 잔치가 끝나고 나면 무엇인가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에 시달려왔는데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도 더러 있는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목련은 그 우아한 자태를 뽐내더니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개나리, 벚꽃도 슬슬 제 자리를 물러설 채비를 하고 있다. 연이어 라일락, 수국도 만발할 것이지만 때맞추어 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슬픔이 되기도 하고 허무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특히 중년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더 할런지도 모른다.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이렇게 노래한 시인이 있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렇게 노래한 시인도 있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하다 기약이 없네
‘동심초’에서도 이와 같은 분위기를 차용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낙화는 어차피 슬픔이요 허무요 탄식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러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목련꽃이 지던 날이었다. 목련은 한 잎 두 잎 꽃잎을 떨구더니 이윽고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날 나는 마치 사랑하던 사람을 보내고 난 다음처럼 쓸쓸하고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갑자기 세상이 적막해 져 버렸다.
“내가 왜 이러지? 나는 누구를 사랑해 본 적도 없고 작별해 본 적도 없는데…”
나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마음을 가누지 못하다가 여기 저기 전화를 걸어보기도 하고 애절한 가락의 ‘봄날은 간다’를 반복해 들으면서 독한 술잔을 비워보기도 했다.
내가 ‘봄앓이’를 하게 된 것은 지명(知命)의 고개를 넘기고부터인 것 같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한 살 두 살 나이를 더해가면서부터 그 징후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꽃들이 지고 난 다음이면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허전함에 시달리곤 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지만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미래를 꿈꾸는 자에겐 오는 것이 되지만 과거에 젖어 있는 사람에겐 가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희망에 살고 늙은이들은 추억에 산다고 한 것일까.
엊그제 청년이던 사람이 어느 새 노인이 되었다. 엊그제 푸릇푸릇하던 나뭇잎이 어느 새 갈색으로 물들었다. 엊그제 새 것이던 물건이 어느 새 고물이 되고 말았다.
이렇듯 시간의 흐름은 모든 것을 변화시켜 놓는다. 이 법칙에서 예외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아 있는 것은 물론, 죽어 있는 것들까지도 변화와 변모를 거듭한다. 이 어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섭리라고만 치부해 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찍이 모란의 시인 김영랑(金永郞)은 이 계절을 일컬어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노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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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8 16:27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