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은 예술의 도시다. 그 중에서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판소리와 순천대사습놀이는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순천판소리 유산, 최고봉은 이영민 선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순천시 상사면 출신으로 ‘순천가’를 손수 지은 사람이다. 아니 관극·시·사’를 두루 섭렵한 ‘국악인이다.
무엇보다도 낙안읍성은 송만갑 판소리명창과 가야금명창의 오태석선생의 살았던 생가가 있다. 또 주암에는 박초월명창의 생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천시는 판소리에 관련된 많은 자료들을 간직하지 못했으며 순천대사습놀이마저도 맥을 잇지 못했다.
다시 말해 순천의 판소리 유산인 ‘국악인 관극·시·사’는 이영민 선생이 1920년부터 1948년까지 28년간 국악인 54명의 소리를 들은 후 한시로 평을 적고 그 한시로 국악을 만들었던 귀중한 자료들을 간직하지 못했었다는 것이다.
가끔 이태호 유네스코 순천지회장은 말한다. “만일 ‘국악인 관극·시·사’사진’이 없었다면 구전에 의존한 소리문화 특성상 저자들의 주관적 기록이 난무했을 것이다.”며 “이것은 곧 구전 문화역사의 비천함을 스스로 자행한 꼴이었을 것”이라고 평했다.
그렇다. 국악인 시, 사, 사진의 그 가치는 일제 강점기 판소리 역사를 담은 조선창극사에 버금가는 가치로 조선 창극사와 함께 판소리 근·현대사를 이어주는 귀중한 자료다. 우리나라 국악 관련 문헌에 수록된 국악인의 대부분이 ‘국악인 관극·시·사’사진에 나온 사람들이다.
이처럼 소중한 자료를 간직보관하기 위해 이영민 선생은 수많은 노력을 아끼지 안했었다. 국악계의 역사단절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국악인 관극·시·사’관련 사업을 펴 선생의 유지를 계승발전 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평소 필자는 언론계 선배인 이영민 선생의 친조카인 이정규씨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술자리를 자주했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면 이 선배는 자신의 큰 아버지인 이영민 선생의 이야기를 곧잘 했다. 이 선배의 말에 의하면 이영민선생은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 좌파세력으로 몰려 정치적 탄압에 시달리다 고향을 떠났다고 했다.
이때 선생은 자신의 유품들을 친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국악인 관극·시·사’만은 자신의 아버지인 이영춘 동생에게 주면서 잘 보관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상범으로 낙인찍힌 형의 꼬리표가 신경이 쓰여 받은 자료를 몰래 마당 옆 담장 밑에 파묻었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는 1980년 임종직전에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어 그 장소를 파보았더니 빛바랜 사진뭉치와 국악관련 자료들이 발견됐었다고 말했다.
‘국악인 관극·시·사’에는 남 29명, 여 25명 등 총 54명의 국악인 사진이 실려 있다. 분야별로는 ▶판소리분야(34) 남 15명, 여 19명 ▶거문고분야(5) 남 5명, ▶가야금분야(9) 남 5명, 여 4명 ▶고수(3) 남 3 ▶피리(2) 남 2명, ▶기타(1) 여1명이 실려 있다. 현재 남녀 각각1명의 월북자를 제외하고 한애순(여) 1명만 생존해 있다. 현재 광주시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조선창극사와는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김여란, 이선유, 한성준, 이화중선, 김초향, 박녹주 등 9명의 기록이 겹치고 있다.
더욱이 이영민 선생의 ‘순천가’는 순천 지명을 쓴 유일한 단가다. 판소리를 시작하기 전 목을 풀기 위한 소리로써 짤막하게 구성돼 있다. 한마디로 순천을 대표하는 시가(市歌)다. 아마도 이영민 선생은 산자수려한 순천을 은근히 표출하고 싶어 ‘순천가’를 지었지 안했나 싶다.
현재 순천가는 여러 형태로 불러지고 있다. 이영민 선생이 지은 사설(가사)은 같지만 오랫동안 곡을 붙이지 못하고 방치돼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제각기 곡이 붙여졌으며, 또 창자에 따라 장단을 달리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원조는 이영민 선생 가사에 박향산(박정례) 명창이 곡을 붙인 순천가다.
낙안읍성 안에는 두 가지 판소리 유산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낙안면 동내리 398번지에 있는 판소리 및 가야금 병창의 명인 오태석 명창 생가다. 오태석(吳太石 1895~1953)은 낙안면 동내리에서 조선조 말 유명한 악인 오수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또 낙안에 있는 또 하나의 유산은 낙안면 남내리 38번지 송만갑(1866~1939) 명창의 집이다.호적상 송만갑은 구례 봉북리 출신이지만, 53세 되던 1918년에 순천 낙안면 남내리 38번지로 주소지를 옮기고 가족 전체가 이주한다. 정확한 이주 동기는 알 수 없다. 다만 가족사적인 어떤 변동을 짐작할 수 있다.
순천 대사습놀이는 1962년 8월 대수해 때 유실된 후 1988년 죽도봉에 복원 된 ‘환선정’. 고종 때 이범진 부사가 비사리 나무에 친필로 쓴 간판만 보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명창들의 등용문인 대사습놀이하면 전주대사습놀이를 생각한다. 그러나 순천에도 전주대사습과 같은 순천대사습놀이가 있었다.
송만갑 명창은 말했다. 그의 자서전 삼천리창간호, 1926.6. 44쪽~48쪽)에서‘대사십노름’,‘청류정노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순천대사습놀이에서 자신이 소리를 했던 것을 일생 최고의 기억이었다고 소개했다.
이같이 순천지명을 노래한 ‘순천가’는 수많은 국악인들과 지역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며 판소리고장임을 방증하고 있다. 판소리가 세계문화유산에 올라가고 아리랑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시점에서 ‘순천가’와 낙안읍성을 재조명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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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9 11:39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