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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거인은 떠났다
글밭 가꾸다가 남쪽글밭
언저리서 쓰러진 평전은
소풍 길에 수놓은 시집을 펼쳐두고서
먼먼 그 길을 떠났다
황토글밭 글씨 뿌리고
갯벌글밭 거름 뿌려대며
죽순글밭 글꽃을 피웠던
작은 거인 세석평전은 떠났다
지리산을 들메치고
수평선을 베고 누워
판소리가락 읊조렸던
세석평전 글소리 정정한데
떠난 발길 기척조차 없다
남쪽바다 길길이 끌어올려
지리산 뻐꾸기 설움 토했던
세석평전 글밭
고희의 수레바퀴는 구르건만
지리산 천왕봉 들꽃은 피건만
변산반도 노을은 붉게 타건만
평사낙안은 . . .
(필자의 작은 거인을 떠나보내고 전문)
지금도 가슴이 울먹울먹 거린다. 平田, 송수권 시인의 해맑은 미소와 끽연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비쳐진다. 그는 언제나처럼 호남의 정신을 되새기면서 호남인의 한을 자신의 詩 속에 담았었던 진정한 호남인이었다.
자신의 노랫말 속에서 남도의 한과 멋 그리고 풍류를 유감없이 피력했던 문학소년 이었다. 아니 작은 거인이었다. 그의 시세계는 너무도 잘 알려져 많은 문인들에게 새로운 지침서가 되고 있다. 하지만 필자에게 알려준 판소리가락과 호남의 정신은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 까 싶다.
그중에서도 호남정신은 우리들의 뿌리로 깊이깊이 뻗어나가야 할 것 같다. 그가 피력한 호남의 3대정신은 황토정신, 갯벌정신, 대의정신이다. 즉, 붉은 황토 길로 이어지는 전라도의 평야지대에서 얻어지는 각종 부산물로 풍부한 먹거리 문화가 형성됐다는 것, 두 번째는 삶의 조각들이 모이고 모여서 이뤄지는 끈적끈적한 개땅쇠 情인 갯벌문화가 형성됐다는 것, 세 번째는 나라가 위급할 때는 죽창을 들고 의병활동을 펼쳤으며, 나라가 평화로울 때는 예술 활동을 펼쳐 충의, 충예 문화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송 시인은 자신의 글밭에서 호남의 정서인 풍류정서를 한껏 펼쳤다. 다시 말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의 판소리가락과 판소리의 노랫말들은 그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우리의 유일한 자산이라며 이 판소리를 계승발전 하는 가락과 시어들이 창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송 시인은 필자가 쓴 ‘깨진 접시하나’ 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었다.
“참 청승맞다. 그가 손수 지은 산속 움막집 빗소리가 이번엔 보름달로 떴다. 좀 뭣하지만 그와 같은 시내에서 십유여년을 비비고 살았던 까닭에 자연스럽게 내가 쓴 시 「혼자 먹는 밥」이 인용되어 우정을 더한 것 같다.‘밥그릇 씻어 엎다보니/무덤과 밥그릇이 닮아 있다/이 빈 그릇들 우리 생애서 몇 번이나 엎었다 되집을 수 있을까//창문으로 얼비쳐드는 저 그믐달/방금 깨진 접시 하나’이는 내가 쓴 시「혼자 먹는 밥」의 2, 3연이다. 그의 삶과 나의 삶을 살강에 씻어 엎은 다면 무척 ‘닮은꼴’이다. 영양괘각(羚羊挂角) 같은 삶을 살면서도 무문(無門)의 풍류인은 못되어도 숲 속에 들어가 발을 씻는 거즐풍류(擧楖風流)의 반풍수쟁이 흉내는 내고 살았을 듯하다. 결단코 우리 삶은 그림자 없이 서 있는 빼빼마른 그 추운 나무는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그렇다. 언젠가는 느끼겠지. 홀로 가는 산문 길에 동반자는 없다는 것을
언젠가 알겠지, 인생길 가다보면 무덤과 밥그릇이 같다는 것을
송 시인은 떠났다. 그가 떠난 언저리에 호남의 정신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남도끝자락 여자만의 어느 바닷가 움막집에 들어가 뎅이굴을 까며 같이 후루룩 소리 한 번 내고 싶다던 작은 거인 평전은 떠났다. 하지만 그의 정신세계인 호남정신은 꿈틀대고 있다. 호남의 3대정신이 빛을 발하도록 끝없는 정진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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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4 09:11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