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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에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다리도 있고 도시와 농촌을 잇는 다리도 있다. 산과 바다를 잇는 다리도 있고 마을과 마을을 잇는 다리도 있다. 장장 38km가 되어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도 있고 불과 9m 밖에 되지 않은 작은 다리도 있다.
다리는 사람이 가장 편하게 왕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설물이다. 때문에 그 고장의 역사와 문화가 배여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다리는 기다림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어떤 다리는 기구한 운명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외국은 자욱한 안개와 더불어 청춘과 낭만의 장소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나라는 다르다. 분단과 이산의 아픔을 겪은 역사 때문인지 그 곳에는 반드시 우여곡절이 숨어 있는 것이다
소설가 하근찬의 수난이대(受難二代)라는 작품을 보면 이런 부분이 등장한다. 징용에 끌려가 한 팔을 잃은 아버지가 한국전쟁으로 역시 한 다리를 잃은 아들을 등에 업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대목이 나온다.
“아부지! 조심하세요.”
등에 업힌 아들 진수가 말한다.
“오냐. 알았다…”
아들을 등에 업은 아버지가 대답한다. 이 부분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수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불태운다. 그 길이가 얼마 되지 않은 다리지만 고난의 과거에서 희망의 미래로 이어지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듯 다리에는 극복의지가 숨어있는 것이다.
숨 막히는 섬 벗어나려
저 바다에 몸 던져 헤엄쳤지
무서운 급류에 밀려 숨 거두고
파도에 잠겨 고혼이 되었던 아우성의 바다
그 슬픈 혼들이 모여
육지로 가는 다리가 되었지
<소록도 연륙교>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시인은 “파도 속에 묻혀버린 고혼들의 의지가 모여 육지로 가는 다리가 되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소록도는 육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육지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익명의 섬으로 묶여져 있어 왕래가 자유롭지 못했다. ‘나병환자들의 집단수용소’ 라는 특수성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 체육대회를 개최했는데 그날만은 가족들과의 면회가 자유로워 떨어져 있는 가족들은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던 것이다.
소록도의 수난사를 여기 일일이 적자면 한정 없을 정도이다. 1916년 일본인 의사가 국립소록도병원 원장으로 부임했는데 소록도의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환자들은 소록도를 천국(?)으로 만드는데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원장이 바뀔 때마다 그 열기는 더해져 환자들은 혹독한 노역을 피할 수가 없었다. 공원 조성하기, 도로 확장하기, 집채 같은 바위덩이를 옮겨 제방쌓기… 등에 동원된 환자들은 손가락이 잘려나간 줄도 모르고 일만했다. 일을 마치고 나서야 몽당손이 되어버린 것을 알고 하늘이 원망스러워 짐승처럼 울었다고 한다.
그러한 환경 속의 환자들은 자구책으로 물통을 끌어안고 바다에 뛰어드는 일이 허다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소록도를 탈출하고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오죽했으면 4대 원장 슈호(國防正秀)가 작업을 독려하러 나왔다가 환자의 칼에 맞아 죽는 사고가 있었겠는가. 그러했던 섬이 악연의 고리를 끊고 수면위로 떠오른 것은 2009년, 소록대교가 개통되고 나서였다. 가슴을 억누르고 있던 억압의 족쇄가 드디어 풀린 것이다. 일 세기만의 변화요 변혁이었다.
몇 년 전, 나는 신문지상을 통하여 경북 안동에 있는 월영교(月影橋)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월영교는 조선시대 어느 부부의 각별한 사랑을 모티브로 하여 놓인 다리라고 한다. 이른바 ‘원이 엄마의 사부곡’으로 알려진 사랑이다. 1998년 안동시에서는 택지개발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고성이씨(高城李氏)무덤 속에서 한 남자의 미라와 함께 한 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원이 아버지께’로 시작된 이 편지는 1591년 6월 1일에 작성된 것이었다.
“당신, 나와 함께 둘이서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죽자하였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먼저 가시나요. 어린 아이들은 누구의 말을 듣고 살라고 먼저 가십니까.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와 같을 까요? 이 편지 보시고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사연은 절절하게 이어졌다. 편지만 발견된 것이 아니었다. 병석에 누은 남편의 쾌유를 빌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엮은 미투리도 한 켤레 발견되었다.
안동시에서는 이 사연을 영원히 기리고자 2001년에 월영교를 완공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간절함으로 이어진 이승과 저승을 잇는 다리였다.
그런데 반세기가 지나도록 바라고 염원하던 ‘자유의 다리’는 왜 빗장에 쇠를 채운 채 소통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것일까. 1953년 그 다리가 놓여진 후, 단 한 번의 포로교환이 있었을 뿐 소통과는 관계없는 방치된 다리로 남아 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얼었던 땅도 풀리듯이 갈등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데도 그러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문제에 부딪쳤을 때 다리가 되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곤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그래서 세상을 새로 배우기도 하고 의식을 전환하는 계기를 맞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의 배우자까지도 누군가의 다리에 의해 만나게 되어 평생을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다리를 놓기 위해 산을 헐고 물을 막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로 뭉쳐지는 마음, 그 마음만 있으면 다리는 반드시 놓여진다. 적소의 땅 소록도가 개방의 땅이 되었듯이 하늘을 울린 간절한 부부의 사랑이 월령교를 놓았듯이. 어제의 구태를 벗어버리고 미래로 가는 의식이 선행될 때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다.
갈등과 불화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 언제까지나 내 고향, 내 산천을 지척에 두고 가지 못하는 설음을 씹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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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3 15:05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