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있다. 매화, 동백꽃, 복수초, 베고니아 등이다. 겨울철에는 새싹을 틔우기 어렵고 수정을 도와줄 벌 나비도 없고 혹한(酷寒)을 견디어야 하니 얼마나 어려운 시기인가. 그럼에도 피어나는 꽃이 있으니 이는 분명히 생명의 신비요 경이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점들이 감안되어서 일까. 사람들은 흔히 매화의 일생을 선비정신에 비유해 왔는가 하면 동백꽃의 그것은 일부종사 체제에 살아온 여인들의 정절에 비유하기도 했다. 얼음장을 뚫고 나온 복수초 베고니아 등도 그러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곧고 굳은 정신으로 일생을 살다간 몇 사람의 선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멀리로는 성리학을 완성한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율곡 이이, 기대승, 가까이로는 정약용, 황현 등이다. 이 밖에도 많은 선비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학문에 몰두하여 불후의 저서를 남겼는가 하면 세인들의 사표(師表)로 살면서 비뚤어진 임금의 조언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했기에 그들의 일생을 불우했다. 더러는 임금님께 직언을 했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고 유배지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기도 했다.
  여성의 정조로 상징되는 동백꽃의 일생은 어떤가? 그야말로 지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인습의 벽을 두꺼웠다. 가문의 전통을 전수(傳受)해야 했는가 하면 일상적인 행동, 걸어 다니는 모습, 앉고 서는 자태까지도 문제를 삼는 사회였다. 그러했으니 여성의 길이 얼마나 험난했겠는가.
  그러나 여성들은 그 험난한 길을 마다않고 갔으며 다시 걸어오기도 했다. 도대체 그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 민족의 고유한 기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인내와 끈기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길을 가다보면 고을마다 눈에 띄는 정려문(旌閭門)들을 흔히 볼 수가 있다. 정려문이란 충신이나 효부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인정한 사람들에 한하여 세워주는 조그만 형태의 건물을 말한다. 한 임금만을 고집하며 섬기던 선비, 부모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한 사람, 부부의 인연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목숨을 바치면서도 정조를 지켰던 여인들…. 낡고 퇴락한 그 건물에 모셔져 있는 기록의 역사는 실로 의미심장한 바가 없지 않다.
 
  입춘이 지나고 우수 경칩이 지났지만 아직도 동장군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입춘추위에 장독이 깨진다더니 이 계절에 특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유관순열사다. 기미년의 3월은 유독 추웠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제에 항거하다 무참히 주어갔던 사람들은 말이 없지만 역사는 남아 올해로 100회 째를 맞는다.
  열사가 일제에 맞서 싸우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던 날이었다. 서대문 형무소8호실에서는 벼락같은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열사는 옥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에 놀란 형무관들은 열사를 끌어다가 모진 고문을 했지만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한 날이 반복되었으니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어찌 버틸 수 있었겠는가. 마침내 잦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다고 말았으니 열사의 나이 18세 때였다. 순국의 꽃이 아니고 무엇인가.
 
 

  1593년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은 그해 7월7일 승전을 자축하는 축하연을 촉석루(矗石樓)에서 벌였다. 이미 진주성을 빼앗기고 사랑하던 사람마저 빼앗겨버린 주 논개! 그러나 그녀의 입가에서는 추상같은 냉소(冷笑)가 감돌았다. 왜냐하면 왜장을 처치해버리기로 결심을 굳혔기 때문이다. 가짜 기생의 신분으로 연회석의 참석에 성공한 논개는 몇 차례 술잔이 돌고 난 후 취흥이 고조되자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의암(義菴)으로 왜장을 유인한 논개는 그를 껴안고 풍덩 몸을 던져버린 것이 아닌가.
  실로 비장한 결심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모진 추위를 견디어 낸 동백꽃의 단심(丹心)이 어찌 이처럼 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충절을 가상하게 여긴 조선의 병사 몇 사람이 떠밀려 버린 그녀의 시신을 남강 기슭에서 거두어 경상남도 함안의 방지마을로 운구해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나에게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승려이자 시인이요 독립 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은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 앞에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만감이 교차하는 시인의 감회를 짚어볼 수가 있다.
 
  나는 지금도 여주의 자연농원에서 핀다는 ‘복수초’을 만나러가던 날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을 매서운 칼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1월 중순이었다. 우리 부부는 무슨 생각에선가 눈 속에서도 핀다는 생소한 이름의 복수초를 보기위하여 길을 나섰다. 아니 무슨 생각에선가가 아니었다. 우리 부부가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보고 되새겨보고자 함에서였다.
  “복수초는 이른 봄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 봄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사로 복 많이 받고 오래 살라는 뜻의 꽃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농원입구에 이르자 복수초에 대한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 부부는 산으로 이어진 둘레 길을 돌면서 복수초 찾기에 바빴다. 얼마 쯤 시간이 지났을까. 아내가 먼저 낙엽 쌓인 덤불 속에서 피어난 복수초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이것 보세요. 정말 신기한 꽃이 피었어요!”
  과연 아내의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처음 보는 복수초가 눈덮힌 덤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게 아닌가. 신기하고 귀한 꽃이어서 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복수초는 자신의 생명력을 과시하듯이 군데군데 피어나 있었다.
  구경을 마친 우리 부부는 인근에 있는 식당을 찾았다. 식당에는 우리 부부처럼 보기 힘들다는 복수초을 접견(?)하러 온 것인지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보! 이제 우리는 복수초 부부라고 해야 할 것 같소.”
  “그게 무슨 소리에요?”
  “무슨 소리긴… 당신은 우리 가정이 깨어져 있던 10년 동안에도 두 자식들을 거두느라 온 갓 힘을 쏟지 않았소. 만일 당신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 가정은 없었을 것이요.”
  나는 우리 부부가 겪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아내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는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사실 우리 부부가 겪은 10년 세월은 눈보다 차갑고 얼음장보다도 냉엄한 것이었다. 그 추위의 겨울을 잘 견디어 냈기에 가정이라는 꽃을 다시 피우지 않았던가.
  아무 탈 없이 살아왔던 우리 가정에 풍파가 닥쳐온 것은 1992년의 일이었다. 어느 협잡꾼의 농간에 걸려들어 전 재산을 날려버린 사건이 있었다. 집도 절도 없이 잃어버린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았겠는가? 그때 나는 직장에 나가고 있었고 두 자식들은 군복무 중이었고 아내는 아내대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각자 따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갑작스러운 가정파괴의 후유증은 컸다. 어느 가수가 <이것이 인생이다>에서 “다시 가라하면 나는 못 가네. 마디마디 서러워서 나는 못 가네”라고 노래한 말 그대로였다.
 

  그렇다. 쉽게 얻어진 결과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결과가 있기까지는 거기에 상응하는 희생이 따라야 한다. 만일 선비들의 곧고 굳은 정신이 없었다면? 그리고 생사를 초월한 여인들의 정절이 없었다면? 이 나라의 정통성은 벌써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까지 우리는그 정통성을 굳건하게 지켜온 것이다.
  아직도 바람 끝이 매서운 2월이다. 지금 쯤 내 고향 순천에는 눈발 속에서 흰옷 입고 찾아온다는 청매(靑梅)가 문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귀한 손님의 내방(來訪)을 모른 체 할 수 있으랴. 더 늦기 전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봄이라도 만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