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수 편집국장
장마 비가 내리고 있다. 촉촉하게 젖어드는 빗물감성을 그냥 흘러 보낼 수가 없는지, 저마다 빗방울의 그리움을 찾는다. 아름다운 추억을 그리는 사람, 고즈넉한 산속에서 빗소리를 듣는 사람, 도심 속의 빗방울을 바라보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비에 젖은 낙안읍성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의 행적이 그립다.
초가와 돌담 그리고 성곽을 적시는 빗소리는 유정하다. 지난 시간을 들춰내는 오묘한 영상기계처럼 그 옛날의 추억들이 잘도 떠오른다. 아마도 추억을 먹고 사는 사람들의 고향이 아닐까 싶다.
날로 변화되는 산업사회 틈바구니에서 유정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 수많은 휴식처가 대처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숨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은 드물다. 그런 맥락에서 낙안읍성은 추억회귀의 보물이 아닐 수 없다. 단연코 으뜸일 것이다.
어쩌면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스마트 폰 마냥, 낙안읍성의 풍광은 마음속의 스마트 폰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기억은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고 희미해진다. 그러나 추억은 때와 장소에 따라 더욱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특히 사람들에게 평온한 마음을 갖게 하는 유정이 머무는 곳은 낙안읍성일이 아닐까 싶다.
지난 주였다. 송준용 시인의 사망소식을 접했다. 황망하고 어이가 없었다. 한 동안 정신이 몽롱해 지고 정신이 없었다. 뭔가 둔탁한 물체에 맞아서 심정지가 일어날 것 만 같았다. 순간적으로나마 송 시인의 사망소식이 거짓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 시인과 필자는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었어도 친형제보다도 우애가 깊었었다.
그토록 낙안읍성을 그리워했고 필자의 움막을 동경했었던 송 시인의 이야기가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있다. 일 년이면 수차례 낙안을 오고갔었던 그의 체취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낙안을 오고갈 때마다 남긴 유작들만 휑하게 놓여 있을 뿐, 그는 가고 없다.
송 시인과 필자는 철도청에서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필연으로 이어졌었다. 오랜 세월의 희로애락을 같이 나눴었던 시인의 체취가 풍겨오고 있다. 그의 감수성은 무한했다. 하루아침에 “낙안읍성에 내리는 비”를 필자의 책상머리에 써 놓고 말없이 떠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그날의 추억을 그리고 싶다.
그는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낙안성에 내리는 비’는 영원할 것이다. 그의 감성이 머물었던 낙안읍성의 감회를 옮겨본다.
“나는 그곳에 가면 지나간 날의 추억과 유정한 시간에 빠져 몸 둘 바를 모를 때가 있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추억의 현장에 당도한 듯한 느낌 때문이다. 초가지붕의 완만한 곡선이며 그 집을 둘러싼 돌담이며 우물터며 장독대 주위에 피어 있는 접시꽃이며. . . 어렸을 적 친구의 이름을 부르면 곧 나타날 것만 같다. 거기다가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술집이나 식당들이 산재해 있어 나의 발길을 끌기에 모자람이 없다. 물론 우리선조들이 즐겨 드나들었던 주막의 형태 그대로인 것이다.”
또 그는 “낙안성에서 술잔을 한 잔, 두 잔, 석 잔을 기우리다보면 금전산자락에서 놀던 물안개가 마을로 내려와 내 술상머리를 어슬렁거린다. 안개는 정처 없는 인생의 행보를 닮았다. 배회하는 안개와 더불어 술을 먹다보면 평소보다 많은 량의 술을 마시게 된다. 낙안읍성에 가면 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럴 때 나는 행복하다”고 했다.
이뿐 아니다. 그는 “장지문을 타고 들어오는 빗소리에 잠이 깨어 대지의 숨결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뭐라고 속삭이는 듯한 말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 말들은 이 고을에 끌려온 사람들의 하소연이 아니었을까. 금전산자락에 타던 노을과 부용산 오리 길의 슬픈 전설과 솔가지 태워 덥히던 인정과 배꽃 떨어지던 날에 흘리던 눈물의 소리가 아니었을까.“ 라는 수필을 썼었다.
그렇다. 송 시인이 남긴 “낙안성에 내리는 비”라는 시와 수필을 한 번 쯤 읽어볼 일이다. 낙안읍성의 진면목을 느낄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발길이 19세기 이전의 사람들의 발길로 바뀌면서 안개와 더불어 술잔을 기울일 수 있을 테니까.
고풍스러우면서도 운치가 있는 낙안읍성으로 가보자. 장마 비에 젖고 있는 돌담과 장독대 그리고 초가지붕과 골목길이 산뜻하게 반겨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막아주면서 순천사람의 애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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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6 08:34 송고
2023-06-26 08:35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