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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울긋불긋 단풍이 물드는 시기가 찾아왔다. 고등학교에 올라온 이후로 시간이 화살같이 지나간다고 느꼈지만 이번처럼 의미 있게 보낸 적은 없었다. 한 달에 두 번 뿐이었지만, 배향례 할머니와의 만남은 내게 있어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문득, 할머니께서 가족에 대해 말씀해주셨던 것이 떠오른다. 주로 자식들의 이야기였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둘째 아들의 이야기였다. 그 분은 초등학교 때부터 남다르셨다고 한다. 한낮에 가족 모두 일할 때 혼자 슬금슬금 빠져나와 집안에서 공부를 하셨으며, 그 열의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계속 이어져 지금은 박사 학위를 취득하셨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척척박사의 그 박사였다. 나는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공부를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말로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을 테지만, 마음먹은 것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말이다. 나도 이런 촌에 살고 있지만, 꿈을 품고 공부를 계속 해나간다면 그분처럼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또, 청소를 시작하기 전에 텔레비전을 보며 할머니와 담화를 나누었던 일이 생각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한참 제주도와 관련된 방송을 하고 있을 때, 할머니께서 제주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셨다. 가족들과 제주도로 비행기를 타고 놀러갔는데 그날따라 할머니께서 입맛이 좋지 않아 아무것도 안 드시고 계셨다고 한다. 그래서 갓 초등학생이 된 증손자가 할머니를 위해 라면을 끓여 드렸는데 하도 기특해서 정말 맛있게 드셨다는 이야기였다. 평소에는 안 먹는다 안 먹는다 하시던 라면이었지만, 할머니께서는 은근히 라면을 좋아하신 듯 했다. 물론 증손자가 직접 끓여주어서 그러셨겠지만. 이 이야기를 접하고 나니  집에 계시는 우리 할머니가 생각났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할머니 할머니 하며 잘 따라다녔는데, 지금은 오랫동안 대화한 것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아마 할머니도 조금은 서운하셨을 것이다. 이제는 손자역할 하며 기쁨을 드릴 것이라 다짐했다.
  할머니 댁에 도착하면 언제나 우리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였고, 할머니께서는 동네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셨다. 재미있는 스토리가 꽤 있었는데 지금생각해보니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이야기가 멈출 때 쯤, 우리는 각자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키가 큰 석호는 빗자루를 들고 거미줄을 떼거나 유리창 위쪽을 닦았다. 나는 바닥을 쓸고 닦으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형들은 설거지를 하고 마당을 쓰셨다. 이렇게 각자 맡은 바를 열심히 하다 보면 금세 청소가 끝나버렸다. 그런데 우리가 청소가 끝나도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리곤 하는데, 예전부터 그 자리에는 민준이형이 계셨다. 그 형은 누가 봐도 정말 성실했다. 혼자 할 일 척척 다하고 본인 일이 아닌데도 할머니께서 불편함을 느끼실 일이라면 끝을 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전에는 할머니께서 아침에 밥을 잘 안 드시는 걸 알고는 먹을 걸 사다드리기도 했다. 형의 진심은 보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물론 나도 그 모습을 본받아 할머니께 정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와의 만남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일은 마늘농사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기계가 해주고 그랬는데 올해는 땅 너비도 좁고, 할 생각이 없으신지 기계를 돌리시는 분이 오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봉사활동을 하러 와서 한시름 놓으셨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팔다리 어깨 무릎 주물러 드리고, 청소 몇 번 해드리는 것 이외에는 별로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때는 정말 ‘봉사’를 할 수 있어서 기쁘기 그지없었다.
  우선 비료 포대부터 날랐다. 약 25포대 정도 됐는데 이 많은 것들을 할머니 홀로 퍼 담으셨다고 한다. 그것도 우리가 힘들까봐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도와주고 싶다고 하시면서. 마음이 좀 찝찝했지만, 앞으로는 힘쓰는 일들은 놔두시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할머니께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한 15포대 날랐을까? 그야말로 뙤약볕 아래 바람 한 점 까딱 안한 환경에서 땀으로 머리를 감았다. 솔직히 집에서 이런 일을 한다고 하면 공부한다고 거짓말치고 살금살금 빠졌는데, 그때는 부모님의 노고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노동이 이런 것이었구나……. 겨우 포대를 나르고 두 번째 작업에 들어갔다. 포대 속의 거름들을 밭에 골고루 뿌리는 것이었는데, 내가 힘이 없어서 그런지 형들끼리 거의 다 하셨다. 나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노력은 했지만, 너무 엉망이여서 눈칫밥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나마 형들이 마음이 넓으셔서 다행이었다. 거름을 다 뿌리고 석회가루도 뿌리자, 오늘 일이 끝났다. 할머니께서는 정말 고맙다며 꿀맛 같은 아이스크림을 사 주셨다. 나는 일하느라 뻗쳤던지 냉큼 받아들고 먹었다. 다음 주에도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할머니의 웃음 그리고 오늘 일이 끝나고 난 뒤의 보람을 느껴보니 의욕이 솟아났다. 저번 주에 이어서 할머니 댁에 방문했었는데 내가 너무 늦어서 그런지 벌써 형들끼리 일을 하고 계셨다. 낯선 얼굴을 가진 형이 한 명 계셨는데, 새로운 조원으로 영입된 듯 했다. 참 인상적이었던 게, 근육이 우락부락해서 일을 잘하실 것 같았다. 아무튼 나도 얼른 자전거에서 내려, 그 곳으로 뛰어갔다. 이번 일은 저번에 뿌렸던 거름들을 갈아엎어 땅을 고르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TV에서 보던 삼지창 같이 생긴 호미(?)를 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농기구여서 마냥 신기했다. 그래서 그것을 들고 열심히 땅을 일구었다. 구름이 많이 껴서 그런지 날이 선선했고, 저번처럼 땀은 나지 않아서 일하기 좋았다. 할머니께서는 기독교 신자이신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땀은 나지 않는다 쳐도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역시나 내가 가장 먼저 나가 떨어졌다. 형들은 무슨 강철체력을 가지고 계신가? 할머니께서 쉬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아야, 라면 몇 봉 끓여 묵어라.”하고 말씀하셨다. 형들 역시 강렬한 눈빛으로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계셨다. 마침 쉴 수도 있고 해서, 부엌으로 달려갔다. 할머니께서는 혼자 사시지만, 집 내부는 상당히 깨끗했다. 나는 냄비를 찾아 물을 붓고 라면을 끓였다. 마침 매운맛을 자랑하는 라면이 4봉이 있었는데 할머니께서 더 먹고 싶냐는 말에 4봉 다 끓여버렸다. 할머니께서는 우리랑 이제 정들었다고 말하시면서,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있으면 주고 싶다고 하셨다. 나도 할머니께 내가 할 수 있는 한, 많이 도와드리고 싶다. 라면을 다 끓이고 상을 차리자 형들이 일을 마치고 오셨다. 라면이 맵기는 더럽게 매웠지만, 정말 맛있게 먹었다. 오렌지 주스도 한 병 있어서 꿀꺽꿀꺽 마셔댔다. 거기에 후식으로 우리에게 주시려고 아껴두셨던 포도까지 먹었다. 이제 할머니께서는 우리의 물주가 되셨다.
  그렇게 밥을 다 먹고 일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안타까운 마음 반, 안도감 반이었다. 할 수 없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가 일을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칠 줄은 모르고 점점 거세져가는 빗줄기. 그날은 할머니께서 이만하고 비 그치면 가라고 하셨다. 순전 얻어먹기만 하고 가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제 이곳은 거의 우리 집이 되었다. 일도 하고, 쉬기도 하고, 할머니랑 이야기도 나누고. 지친 학업생활 속에 유익한 낙이 되는 그런 집이 되었다. 봉사활동을 하러 온 이후에서야 느낄 수 있었던 것인데, 그들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청소나 빨래, 물질적 지원 같은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외롭고 구석져 있는 차디찬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줄 우리의 손길과 마음이라는 것이었다. 할머니께서 반갑다며 마중 나오실 때, 우리를 손자처럼 여겨주실 때 정말 마음이 편했다.
  언제부터일까? ‘독거노인 봉사활동’이라는 명목으로써가 아니라, 친할머니를 뵈러가는 기분으로 이 일에 임하게 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