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 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별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자화상>은 서정주(徐廷柱, 1915.5.18~2000.12.24)의 대표시이다. 불교사상과 자기성찰 등을 표현하고 있다.
<자화상>에서 자신을 키운 것이 ‘8할의 바람'이라고 말한 것은 뿌리 없이 방황하는 시인의 모습이다. "애비는 종이었다"고 진술한 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종이어서가 아니다. 서정주의 아버지는 전북 고창의 질마재 마을에서 소작인들을 관리하는 중간 지주였다.
서정주가 표현한 종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노예 상태에 있던 우리 민족의 처지를 비유한 것이다. 시인은 <자화상>에서 죄인처럼, 천치처럼 살고 있는 삶을 강요하는 억압적인 현실을 부정하고자 몸부림치고 있다.
서정주에게 '종'인 '애비'가 식민지 현실을 부정한 원망의 대상이라면, "숱 많은 머리털과 외할아버지의 커다란 눈“은 식민지 현실 속에서 억눌려 있는 한국전통이고 계승 발전시켜야 할 대상일 것이다.(詩人, 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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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1 06:04 송고
2013-06-01 06:06 편집